[사진기자의 ‘사談진談’]승짱, 그날 찬 바닥은 미안했어요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6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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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 기온이 영하권으로 떨어졌던 2017년 1월 4일 대구 삼성라이온즈파크에서 그라운드에 엎드려 포즈를 취한 이승엽. 추운 날씨에도 촬영 내내 웃음을 잃지 않았다.
최저 기온이 영하권으로 떨어졌던 2017년 1월 4일 대구 삼성라이온즈파크에서 그라운드에 엎드려 포즈를 취한 이승엽. 추운 날씨에도 촬영 내내 웃음을 잃지 않았다.
김재명 기자
김재명 기자
사진기자는 잔인한 직업이다. 카메라는 모든 사물을 대상화시킨다. 기자는 앵글 뒤편에 숨어서 앞쪽의 피사체를 겨냥한다. 찍히는 자와 찍는 자, 나는 항상 찍는 자. 고로 사냥꾼이다. 사냥하는 사람은 당하는 사람의 마음을 모르고 잔인해질 수도 있다.

그러다 내가 사냥을 당한 적이 있다. 최근 취재 현장에서 타 언론사 기자가 불쑥 내 카메라를 집어 들더니 나를 찍었다. 액정화면에 담긴 내 모습이 무척 어색했다. 그들의 심정을 잠시나마 생각하게 됐다.

카메라 앞에서 긴장하는 취재원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든다. 물론 능숙하게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선수들’도 있다. 운동선수, 정치인, 연예인이 그들이다.

그중 이승엽은 기억에 남는 ‘선수’다. 지난해, 1년 중 가장 춥다는 1월에 그를 만났다. 그해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는 그를 담기 위해 대구 훈련장을 찾았다. 그의 훈련에 누가 되지 않기 위해 서둘러 찍어야 했다. 일단 실내 체력훈련과 캐치볼 장면 촬영은 일사천리로 끝났다. 유달리 유연한 몸을 가졌다는 이승엽은 카메라 앞에서 유연했다. 대개 카메라 앞에서 뻣뻣하게 굳어버리는 운동선수와 달리 카메라를 주물렀다.

하지만 야외 촬영이 필요했다. 아침 최저 기온이 영하 10도 가까이 떨어지는 한겨울, 그를 잔디 위에 엎드리게 해야 했다. 혹한 속에서도 10분이 넘게 한기를 온몸으로 받아낸 그는 끝까지 웃으며 촬영을 마쳤다. “아, 이승엽은 역시 이승엽이구나.”

정치인들은 찍힘을 즐기는 이들이다. 얼마나 좋아하는지 ‘국회의원들이 골프장에서 번개를 카메라 플래시로 착각해 손을 들었다가 낙뢰를 맞았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 여의도 정치권에서는 ‘비공개’ 회의가 많다. 그런데 시간과 장소를 슬며시 알려준다. 현장에 도착해 보면 어느새 ‘비공개’가 ‘공개’로 바뀌기 일쑤. 그만큼 사진을 통해 국민에게 알려지는 것을 좋아한다.

정치 9단이라 불리는 경험 많은 정치인들은 ‘클래스’가 다르다. 2016년 박지원 당시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전남 강진에 머물던 손학규 전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과 술자리를 했다. 손 전 고문을 영입하기 위해 그가 머물던 움막이 있는 강진까지 직접 내려간 것. 두 정치인은 내부가 잘 보이게 문을 활짝 열어 막걸리를 주고받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카메라에 잡히게 했다. 누군가 둘의 만남을 슬쩍 알려주지 않았다면 나오지 못했을 사진이다.

박지원 의원이 지난해 국민의당 제보 조작 사건과 관련해 ‘자신의 목을 내놓는다’는 발언을 하자 여당에서 ‘머리 자르기’라고 평했다. 그러자 의원총회에 참석해 마치 ‘머리가 아직 붙어있다’는 것을 말하듯이 목을 만지는 동작을 했다. 그러자 수많은 기자들이 그 장면을 찍기 위해 몰려들었다. 어떻게 해야 찍히는지를 너무 잘 안다.

영화 개봉을 앞둔 배우들은 조용한 호텔이나 카페에서 인터뷰를 진행한다. 몇 년 전 김혜수의 사진을 찍은 곳도 카페 옥상이었다. 톱스타답게 ‘드르륵’ 셔터 소리만 들리면 동물적으로 포즈를 바꿨다. 소품은 의자 하나뿐. 하지만 그는 팔색조처럼 다양한 표정으로 다양한 사진을 ‘대량 생산’해 냈다. 단 5분 만에.

송강호도 그랬다. 늘 치아가 드러날 정도로 활짝 웃는 호쾌한 표정으로 유명한 배우지만 이날은 달랐다. 분위기 있는 조명 앞에서 입꼬리만 살짝 올릴 뿐. 알고 보니 홍보하려는 영화에서 본인이 ‘조폭’ 역을 맡아서란다. 그는 카메라를 가지고 노는 얄미운 프로.

일반인들은 찍히는 걸 어색하게 여긴다. 커다란 카메라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으니 쉽게 내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기다림’이 필요하다. 카메라는 잠시 내려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낸다. 젊은이들에게는 최신 노래나 인기 드라마 이야기를 하고, 중년들에게는 자녀나 집 등 소소한 소재부터 시작한다. 이야기가 어느 정도 진행되면 방어막이 사라진다. 그때 카메라를 슬며시 잡는다. 처음엔 부자연스러웠지만 진심이 느껴지면 프로 못지않은 좋은 사진이 나온다. 내 마음에 진하게 남는 인물 사진도 ‘프로’들보다는 아마추어를 찍은 사진들이다. 사람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사진#이승엽#카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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