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임우선]‘美 특허권’ 문제는 풀어도 말은 못하는 학교 영어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6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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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우선 정책사회부 기자
임우선 정책사회부 기자
밥상에 꼭 필요한 김치가 떨어졌다. 남편에게 김치 만들 재료를 사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남편이 배추 대신 인삼만 잔뜩 사왔다. “이게 뭐야? 배추는?” 하고 묻자 남편 왈, “인삼이 더 고급이잖아”라고 했다. “고급이면 뭐 해? 필요한 걸 사와야지” 하자 남편은 “그래도 고급이니 담가두면 좋을 거야”라고 했다.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불행히도 이런 일이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것도 교육계에서…. 바로 영어교육 얘기다.

22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는 한국 영어교육의 위기를 논하는 영어학회 공동 심포지엄이 열렸다. 발표자로 나선 황종배 건국대 교수는 EBS 수능 특강 영어교재에 실린 한 영어 지문을 보여줬다. 미국 프린스턴대 출판물에서 뽑아낸 ‘미국의 부동산 특허권’에 관한 지문이었다.

그것은 마치 ‘인삼’ 같은 고급 지문이었다. 하지만 여덟 문장짜리 짧은 글은 생소한 내용과 난해한 문장이 반복돼 한국어 번역을 봐도 당최 맥락을 알기 어려웠다. 그야말로 ‘어렵다’는 데 유일한 출제 의의가 있었다. 황 교수는 “이런 EBS 문제가 실제 수능에 70%나 연계되고 학생들이 여기에 매달리면서 한국의 영어교육 자체가 완전히 망가졌다”며 “대체 학생들이 이런 문제를 풀어야 하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서홍원 연세대 교수는 ‘인삼 지향적’ 영어 평가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 보여줬다. 연세대는 2011년부터 모든 입학생을 상대로 영어 말하기 및 글쓰기 시험을 치러 수준별 영어교육을 하고 있다. 평가등급은 A1, A2, B1, B2, C1, C2 등 총 6단계로 나뉘어 있다. A1은 영어로 전혀 소통이 안 되는 수준이고, C2는 원어민 중에서도 고급 영어를 구사하는 수준이다. 그런데 연세대 입학생 10명 중 7명이 B1 이하라고 한다. 70%가 ‘영어로 소통 잘 안 됨’ 평가를 받는 것이다. 그는 “처음에 굉장한 충격이었다”고 말했다.

연세대에 입학할 실력이면 미국 특허권에 대한 수능 지문 정도는 문제없이 풀었을 학생들이다. 그런데도 “학생들의 영어 읽기 수준이 매우 낮다”고 서 교수는 지적했다. 그는 “단문 위주의 수능 영어만 파다 보니 정교한 논리로 전개되는 장문의 글을 전혀 해독하지 못한다”며 “한마디로 단어는 어마어마하게 많이 아는데 이를 전혀 활용할 줄 모른다”고 개탄했다.

지금의 아이들이 성인이 돼 살아갈 2030∼2050년의 한국을 상상해 보자. ‘지하철의 노약자석과 일반석 위치를 바꿔야 할 정도’로 노인 인구가 급증하는 시대다. 소비력을 가진 이들과 생산인구가 줄면 내수시장 자체가 확 쪼그라들 수밖에 없다. 지금보다 더 해외시장을 기반으로 경제를 일구고 일자리를 창출해야 하는 구조다. 그만큼 세계 경제와 해외 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누구와도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는 언어 능력을 갖춰야 한다.

하지만 정부의 영어교육은 한결같이 이와 정반대로 가고 있다. 올 초 초등 1·2학년 영어 방과 후 수업 금지 조치로 학부모들의 반발이 일자 교육부는 “그 대신 학교 영어교육을 내실화하겠다”며 자문단을 급조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위원 중 한 명이 자문단을 그만뒀다고 한다.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오죽 답답했으면 위촉장까지 반납했을까.

오늘도 교육부의 담론은 ‘수능 영어 절대평가가 옳으냐, 옳지 않느냐’ ‘수능 EBS 연계를 70%로 하느냐, 50%로 하느냐’ 수준에 멈춰 있다. 본질적으로 다 부질없는 논의다.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소통할 수 없는 영어’임은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한국 영어의 맛이 인삼으로 담근 김치를 먹은 듯 씁쓸하기만 하다.
 
임우선 정책사회부 기자 imsun@donga.com
#영어교육#수능 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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