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명건]권력에 취한 사법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6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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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건 사회부장
이명건 사회부장
“대법원 사건이 드루킹 특검을 덮을 것이다.”

검찰 핵심 관계자는 올 하반기 수사 국면을 이렇게 전망했다. 대법원 법원행정처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가 벌어질 게 분명하고, 그 파장이 엄청날 것이라는 의미다. 이 수사는 이르면 이달 말 시작될 드루킹 특검 수사와 동시에 진행될 것이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전현직 고위 법관들의 검찰 고발 여부를 검토 중이다. 하지만 검찰은 거기에 구애받지 않을 것이다. 법원 특별조사단이 작성한 A4 용지 240쪽 분량의 의혹 조사 결과 보고서에 많은 수사 단서가 있다는 게 검찰의 판단이다. 또 이미 참여연대와 전국공무원노조 법원본부 등이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을 고발했다.

검찰은 다만 법원 위상을 감안해 김 대법원장이 형사 조치를 취할 여지를 뒀을 뿐이다. 6·13지방선거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 선거 직후 본격 수사에 나설 방침이다. 법원 중심부에 직접 칼을 대는 것이다. 결국 전현직 고위 판사들이 줄줄이 검찰에 불려가고, 대법원 등의 판사실 여러 곳이 압수수색을 당할 것이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발단은 대법원 업무 분담을 위한 ‘상고법원 도입’이었다. 법원행정처는 여기에 걸림돌이 될 것으로 판단한 판사들이 모인 국제인권법연구회의 동향을 파악했다. 그리고 청와대와 판결로 거래를 하려고 했다.

‘민감한 정치적 사건 등에서 BH(청와대)와 사전 교감을 통해 비공식적으로 물밑에서 예측 불허의 돌출 판결이 선고되지 않도록 조율하는 역할 수행.’ 법원행정처가 2015년 11월 19일 작성한 문건의 한 대목이다. 짧지만 법원 전체를 ‘판결 오염’의 나락으로 처박기에 충분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기자회견에서 “재판에 부당하게 관여한 적이 결단코 없다”고 했다. 하지만 실제 판결이 오염된 경우가 있건 없건 결론은 마찬가지다. 그런 의심만으로도 판결은 ‘복종의 권위’를 잃게 된다.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법치주의, 법의 지배가 뿌리째 흔들린다.

김 대법원장은 대국민 담화에서 이 문제를 사법행정과 법관 인사 시스템 개편으로 해결하겠다고 밝혔다. 특별조사단도 같은 의견을 제시했다. 물론 필요한 조치다. 하지만 궁극적인 해법은 못 된다. 근본 원인이 행정 체계나 인사 시스템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법권력’에 취한 게 근원이다. 사법부는 1987년 민주화 이후 정치권력의 종속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지난 30여 년간 입법부, 행정부에 대응해 삼권분립 실현에 매진했다. 가시적 성과가 있었다. 그 결과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 전 분야에서 주요 이슈와 갈등의 법원 판단을 구하게 됐다. 자의든 아니든 사법은 권력이 돼버렸다.

그 권력의 오만이 판사들 동향 파악이었다. 그 권력의 부패가 정치권력과의 거래 시도 구상이었다. 힘이 세져 재판의 독립, 법관의 독립이 가능해지니까 그걸 매개로 더 큰 힘을 가지려고 했다. 힘이 약한 종속 상태라면 어떻게 거래를 시도할 생각을 했겠는가.

하지만 아직도 공정하고 정의로운 판사가 다수라고 나는 믿는다. 올바른 판결을 하려고 먹는 시간, 자는 시간을 쪼개 혼신의 노력을 다하는 판사들이 많다. 그러나 그들도 수시로 자문하고 경계해야 한다. ‘나는 권력에 빠져들고 있지 않나?’ 법이 권력에 더럽혀지는 건 순식간이다.

“그냥 판사들이 있을 뿐이다.” 닐 고서치 미국 연방대법관은 지난해 3월 상원 인준 청문회에서 “공화당 판사, 민주당 판사 같은 것은 없다”며 이렇게 말했다. 정치권력과의 단절을 강조한 것이다.

사법권력에 대해서라고 다를까. 사법행정권 남용이 근절되려면 이런 자세가 필요하다. ‘그냥 판사들이 있을 뿐이다.’
 
이명건 사회부장 gun43@donga.com

#대법원#행정권 남용 의혹#드루킹 특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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