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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오신날]“용맹정진하다 죽는다면 그보다 수지맞는 장사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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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오신날]“용맹정진하다 죽는다면 그보다 수지맞는 장사는 없어”

손효림기자 입력 2018-05-17 03:00수정 2018-05-17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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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이 본 ‘스승 혜암’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대선사 혜암 스님(1920∼2001)의 가르침과 삶을 기리는 회고록 ‘스승 혜암’(376쪽·1만6000원·김영사)이 출간됐다. ‘혜암선사문화진흥회’가 스님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제자와 재가자 등 25명의 이야기를 담았다.

전남 장성군에서 태어난 혜암 스님은 17세에 일본으로 유학해 동서양의 종교와 철학을 공부하던 중 출가를 결심하고 귀국했다. 1946년 26세에 경남 합천군 해인사에 출가해 인곡 스님을 은사로, 효봉 스님을 계사로 해 ‘성관’(性觀)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해인사 원당암 맨 위쪽에는 미소굴이 있다. 혜암 스님의 생전에 주로 머물던 곳으로 유품 전시 공간으로 바뀌었다. 미소굴 앞에는 혜암 스님이 제일 강조했던 ‘공부하다 죽어라’를 친필 글씨로 새긴 비가 서 있다. 해인총림 방장 원각 스님은 “혜암 스님은 출가한 지 백 년이 되었더라도 참선공부를 하지 않는 사람은 법랍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셨다”고 말했다. 이어 “손수 양말을 꿰매고 호미질을 하며 장작을 패고 풀을 베고 산길을 넓히셨다. 정진 아니면 일, 일 아니면 정진으로 일관하신 분”이라고 덧붙였다.

혜암 스님은 설법을 하는 대상에 차별을 두지 않았다. 한 번은 스님들이 태백산 정상 부근에 간 적이 있었는데 무당들이 굿을 하려고 자리를 펴고 있었다. 혜암 스님은 갑자기 무당에게서 목탁을 빌려오더니 “목탁을 봤으니 반야심경 한 번 하자”며 봉독을 시작했다. 이어 법문을 했다. 법문이 끝나자 무당들은 고개 숙여 큰절을 하며 “좋은 법문 감사드린다”고 인사했다.

혜암 스님이 해인사 원당암 경내에 밭일을 하다 잠시 허리를 편 모습. 스님은 평소 제자들에게 “백 번 싸워 백 번 이기더라도 한 번 참는 것만 못하고 만 번 옳은 말을 할지라도 한 번 침묵하는 것만 못하다”고 당부했다. 김영사 제공
하루 한 끼만 먹고, 눕지 않고 좌선하는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평생 실천한 혜암 스님은 제자들에게 자주 이렇게 말하며 수행을 당부했다. “용맹정진하다가 죽는 놈 못 봤어. 용맹정진하다 죽는다면 그보다 수지맞는 장사는 없어. 정진하다가 죽을 수만 있거든 죽어버려. 내가 화장해 줄 테니까.”

수행 뒷바라지도 즐거운 마음으로 손수 했다. 봉암사 수좌 적명 스님은 “정진하던 선방대중이 빵을 먹고 싶다고 하자 혜암 스님은 시장에 나가셔서 당시로는 먹기 힘든 고급 식빵을 사오셨다”고 말했다. 안거 중에 대중이 두부를 먹고 싶다고 하자 마을로 직접 내려가 두부를 가져온 적도 있다.

‘나는 새로 떨어뜨린다’는 이후락 일행이 동안거를 하던 지리산 칠불암에 찾아와 비구들이 정진하던 선방에서 자겠다며 방을 점거한 적이 있었다. 혜암 스님은 “당장 선방에서 나오라”며 호통 친 후 이후락 일행을 보살들이 지내던 방에 데리고 가 철야정진을 시켰다. 다음 날 이후락은 칠불암을 동양 제일 선원으로 만들어 주겠다며 필요한 것을 물었다. 혜암 스님은 일언지하에 이를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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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력이 많이 쇠했던 70대 중반 혜암 스님은 선방에 놓여진 평상 위에서 용맹정진을 하다 떨어진 적도 있었다. 제자들이 가슴을 졸이며 ‘이제 정진을 쉬시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스님은 “끈을 가져와서 나를 평상에 묶어라”고 한 뒤 일주일간의 용맹정진을 마쳤다.

서릿발 같은 기세로 정진하고 청빈한 삶을 실천하며 진리를 찾았던 혜암 스님의 자취는 책 곳곳에서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불교#부처님오신날#석가탄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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