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종수]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5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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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 정치에 휘둘린 지방자치, 공동체 사라지고 선거만 남아
어울리는 기쁨 사라진 자리엔 낮은 행복도와 우울한 뉴스만
진정한 균형발전 이루려면 각 지역의 정체성 되살려야

이종수 객원논설위원·연세대 행정학과 교수
이종수 객원논설위원·연세대 행정학과 교수
민호야. 내가 강의를 마치고 늦게 귀가했을 때 안동에 사는 제자로부터 전화가 왔었다는 말을 전해 듣고 가슴이 설렜다. 전화의 주인공이 너인 줄 금방 알았고 네가 전화를 한 이유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네가 대학을 졸업하며 취직을 마다하고 고향으로 내려간 지 3년이 되었구나. 대기업에 취직해 평탄한 길을 갈 수도 있었지만, 고향으로 가서 지역 발전에 밀알이 되고 싶다고 했지. 몇 년 고향에서 심부름을 하다 6월 선거에 출마한다는 걸 느낌으로 알아차렸다.

이튿날 ‘선생님, 제가 지방의회에 들어가 일을 하려 합니다. 선생님의 공동체 강의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라고 너는 문자를 보내왔다. 사실 네가 너의 꿈을 얘기했을 때 나는 그걸 훌륭하다고 격려는 하였지만 속으로는 괴로웠다. 아들을 서울로 보내 대학을 졸업시켰더니 취직은커녕 맨손으로 돌아온 너를 바라볼 부모님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기성 정치판의 이권으로 분할된 지방정치를 뚫고 가야 하는 너의 고충도 떠올랐다.

자치제도를 부활시킨 지 27년이 지났고 새 정권은 분권을 말하지만 정작 국민들은 자치를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국민의 80%는 자치의 효과를 못 느끼고 외려 이런 상태라면 없애는 게 낫다는 사람들도 많다. 지방선거는 있으되 지방자치는 없고, 지역 현안보다는 중앙정당의 바람몰이로 선거가 결판나며, 무능과 부조리가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민호야. 지역 공무원들은 입만 열면 ‘주민들에게 참여의 기회를 주어도 참여를 하지 않아 자치가 어렵다’고 한탄한다.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니? 지역 공동체가 와해되었기 때문이다. 동네와 삶터에서 어울림의 기쁨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군청에서 어느 날 나와 어깨춤을 추라고 격려한다고 갑자기 열성을 보일 리 만무하다. 어울리는 기쁨으로서의 공동체가 와해된 대가는 우리에게 혹독하다. 행복도가 세계 57위 정도로 낮고, 자살률과 이혼율 그리고 사기와 위증, 또 형사소송도 최고 수준이다.

공동체를 살려야 하는데 문제의 본질에 대한 지도자들의 이해도 부족하다. 영국은 이미 중앙정부에 공동체부를 하나의 부(部)로 설치한 지 오래다. 동네를 동네답고 삶터를 삶터답게 회복시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 때문이지.

민호야. 지역의 텃세와 정당의 진입장벽 때문에 네가 고생을 할 것이다. 그러나 절망할 필요는 없다. 고향을 살리고 공동체를 회복시키는 데 인생을 바치겠다며 뛰어든 너의 꿈이 그만큼 아름답다. 내가 하나뿐인 아들을 자연 속에서 공부하게 하려 경남의 거창고등학교를 찾았을 때, 그 학교 강당에 전영창 선생의 말씀이 새겨진 걸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자신의 제자들이 취직할 때 명심하길 바라는 가르침을 새겨 넣은 거였어. 월급이 적은 곳으로 가라. 승진의 기회가 없는 곳으로 가라. 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면류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있는 곳으로 가라. 네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너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라!

거기서 한참 멍하니 서 있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청년들에게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걸 찾으라’고 권하는 시대에 네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너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라니! 좀 더 우아하게 말하는 사람들은 ‘너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어보라’고 하더라만. 민호야, 이렇게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일생을 걸겠다는 것보다 더 강렬하고 위대한 게 있을까. 적성, 돈, 운, 혹은 그 무엇도 그런 사람을 막을 수는 없지. 전영창 선생은 6·25 직후 미국에서 학위를 받고 어느 대학에서 부총장으로 오라는 제안을 받고도 8명이 우산을 쓴 채 공부하는 학교가 있다는 말을 듣고 거창으로 달려갔다. 거기서 일생을 바쳤다. 오늘 우리가 거창을 교육특구라 부른다면 그건 그분 때문이란다.

너의 전화 후 공동체를 살리고 풀뿌리를 회복하는 것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토론했던 수업의 강의록을 다시 열어보았다. 그날 수업의 제일 큰 화두는 이거였더구나. 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
 
이종수 객원논설위원·연세대 행정학과 교수
#지방의회#지역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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