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전쟁의 고통 어루만지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5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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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M.T. 앤더슨 지음/장호연 옮김/546쪽·2만2000원·돌베개

1941년 9월, 아돌프 히틀러(1889∼1945)의 독일 국방군이 레닌그라드를 포위했다. 후에 ‘레닌그라드 포위전’이라 불리게 될 900일간의 사투가 시작된 것. 폭격과 굶주림, 추위로 레닌그라드 인구의 절반이 숨졌다. 도시는 폐허가 됐고, 길거리에는 꽁꽁 얼어붙은 시체가 즐비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죽은 이의 살을 베어 먹으며 버텼다.

레닌그라드에서 나고 자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는 포화가 빗발치는 그곳에서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를 작곡했다. 교향곡의 웅장한 선율은 가족을 잃은 시민들을 어루만졌고, 살아남은 시민들을 다독였으며 전선의 군인들을 결속시켰다. 이 곡은 서방세계에서도 극찬을 받았다. 소비에트는 ‘교향곡 7번’의 악보를 30m 길이의 마이크로필름에 담아 미국에 전했다. 1만6000km의 여정 끝에 뉴욕으로 전해진 이 곡은 곧 서방 각국에서 널리 연주됐고, 연합국이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추축국에 맞서 동맹을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소비에트 당국은 ‘교향곡 7번’ 발표 이후 쇼스타코비치를 반나치 투쟁의 선봉으로 치켜세웠다. 그러나 쇼스타코비치가 자신에게 쏟아진 찬사를 반겼을 것 같지는 않다. 그에게는 소비에트도 나치도 똑같은 억압의 주체에 불과했다. 그는 “레닌그라드는 스탈린이 파괴했고 히틀러는 그저 마무리했을 뿐”이라고 회고했다.

수많은 예술가가 잔인하게 숙청당한 ‘대공포 시대’, 쇼스타코비치는 서슬 퍼런 감시 아래에서 소비에트와 붉은 군대를 찬양하는 곡들을 써야 했다. 동료들을 숙청한 비밀경찰들을 위해 춤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그는 비겁한 겁쟁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었으며, 스스로도 자신이 목숨을 부지한 방식을 평생 수치스러워했다. 레닌그라드를 구해낸 역사적인 대작을 남기고도 쓸쓸한 말년을 보내야 했던 그의 삶은 광기의 역사가 빚어낸 또 하나의 비극이었다.

이지운 기자 easy@donga.com
#죽은 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m.t. 앤더슨#쇼스타코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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