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비적 건물에 가린 도시… ‘작은 건축’으로 숨 불어넣어야”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5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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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로잔공대 뤼캉 명예교수
제자 남성택 교수와 건축대담

“서울이 놀라운 점은 개별 건물이 아니라 ‘도시’ 자체였습니다. 도시가 내뿜는 에너지가 건축을 압도한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도시 전체로 강한 생명력이 느껴지죠.”

지난달 24일 서울 성동구 한양대에서 만난 자크 뤼캉 스위스 로잔공과대 명예교수(71)는 한국 건축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그는 제자인 남성택 한양대 교수(44)와 전날까지 이틀에 걸쳐 경동교회와 동대문디자인플라자, 경복궁, 이화여대 등 서울 건축물을 전통과 현대를 가리지 않고 두루두루 둘러 봤다고 했다. AMC 등 여러 건축전문지 편집장도 거친 뤼캉 교수는 여러 나라의 근·현대 건축 현상을 연구해왔다.

“(서울처럼) 도시의 에너지가 강하면 하나의 건물이 보기 흉하더라도 전체 풍경 속에 감춰지는 등의 강점이 있죠. 반면에 유럽의 도시들은 생동감이나 역동성이 떨어지는 대신 개별 건축물이 두드러지고 사람이 건물에 관심을 갖게 만듭니다.”

남 교수가 “한국 건축은 ‘야수주의(Brutalism·20세기 후반에 두드러진 거칠고 비정한 건축 스타일)’적인 매력이 있다”고 하자 뤼캉 교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그는 ‘인간을 위한 주거’를 고민했던 근대의 건축 거장 르코르뷔지에(1887∼1965) 연구에 천착해 온 학자답게 “기념비적 건축뿐 아니라 전체에서 95%를 차지하는 ‘일상의 건축’도 신경을 써야 한다”고 조언했다.

지난달 24일 서울 한양대에서 만난 자크 뤼캉 교수(왼쪽)와 남성택 교수는 “한국 건축사에서 김중업이 차지하는 의미에 대한 연구가 여전히 절실하다”고 했다. 김중업은 세계적인 프랑스 건축가 르코르뷔지에의 제자로, 김수근과 함께 한국 근대 건축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지난달 24일 서울 한양대에서 만난 자크 뤼캉 교수(왼쪽)와 남성택 교수는 “한국 건축사에서 김중업이 차지하는 의미에 대한 연구가 여전히 절실하다”고 했다. 김중업은 세계적인 프랑스 건축가 르코르뷔지에의 제자로, 김수근과 함께 한국 근대 건축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한국은 1980년대부터 건설회사 주도로 수도권 전역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들을 짓는 데 중점을 뒀다. 이후에도 정부 주도의 대형 프로젝트 기획이나 해외 유명 건축가를 초빙해 랜드마크를 만드는 데만 집중했다. 남 교수도 “젊고 신선한 건축가들이 참여할 수 있는 작은 지역 프로젝트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본주의 시대로 들어서며 세계 거대 기업들이 대규모 건축물로 기업 이미지를 높이려 하고 있습니다. 이 흐름이 주거를 위한 본래 건축의 취지에 맞는 방향인지, 그 정도 가치를 가진 일인지 심도 있는 고민이 필요합니다.”(뤼캉 교수)

뤼캉 교수는 앞선 21일 김중업건축박물관과 한국건축역사학회가 주최하고 유유제약이 후원한 심포지엄 ‘르코르뷔지에와 김중업, 그리고 한국의 현대건축’에 참석했다. 한국 근대 건축의 선구자인 김중업(1922∼1988)은 1952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열린 제1회 국제예술가대회에서 르코르뷔지에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됐다. 김중업과 뤼캉 교수의 인연이 이어지는 대목이다.

‘명보극장’ ‘드라마센터’ ‘서강대 본관’ 등을 설계한 김중업은 1960년 그의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주한 프랑스대사관을 선보였다. 콘크리트로 지붕 처마 선을 직선과 곡선으로 한 형태와 단아한 공간 처리는 한국의 얼과 프랑스다운 우아함이 잘 어우러진 건물로 한국 현대건축에 큰 영향을 주었다.

뤼캉 교수는 “한국 건축사에서 김중업이 차지하는 의미에 대한 연구가 여전히 절실하다”며 “스승에게서 받은 영향을 규명하는 것은 물론이고 작가의 독창적 가치, 한국의 지역적 특성 등에 대한 고찰이 이뤄져야 한다”고 당부했다. 남 교수 역시 “김중업은 건축사에 채워져야 할 빈 캔버스다. 김중업이 규명되지 않으면 오늘과 미래의 건축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뤼캉 교수는 “서울은 고급 호텔과 재래시장이 한 블록 떨어진 거리에 공존하는 도시”라는 남 교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건축은 스스로 자라는 식물입니다. 과거 건축가들의 생각과 아이디어는 금방 구식이 돼버리죠. 현대와 전통이 공존하는 한국 건축의 고유한 특징을 찾아내고 고민해야 합니다.”

조윤경 기자 yunique@donga.com
#자크 뤼캉#르코르뷔지에#김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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