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도 집중투표제 문 열어줘… 투기자본에 악용될 우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5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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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공단이 의결권 행사 지침을 개정해 집중투표제에 찬성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 것으로 확인됐다. 집중투표제는 외국계 헤지펀드 등이 국내 상장사를 공격할 때 도입을 요구하는 제도 중 하나다. 이에 앞서 국민연금은 앞으로 보유 중인 국내 주식 모든 종목을 공개하고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해 이들 기업의 의사결정에 적극 관여하겠다고 밝혔다.

국민연금은 경영 투명성을 통해 기업 가치를 높이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지만 일각에서는 정부가 600조 원에 이르는 국민연금을 앞세워 민간 기업 경영에 지나치게 개입하면 ‘연금 사회주의’의 폐해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 외국 투기자본 집중투표제 악용 논란

국민연금은 지난달 의결권 행사 지침을 개정해 ‘집중투표제로 이사를 선임하는 경우 주주 가치 증대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조항을 마련했다. 국민연금이 주요 주주로 있는 회사가 집중투표제 도입을 안건으로 올리면 국민연금은 이에 찬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에 앞서 법무부는 2월 집중투표제 도입을 의무화하는 방향으로 상법을 개정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국회에 제출했다.

집중투표제는 주주총회에서 선임하려는 이사 수만큼 의결권을 행사하도록 해 지지하는 이사 후보 1인에게 표를 몰아줄 수 있는 제도다. 헤지펀드 등 외국인 소액주주도 힘을 합쳐 입맛에 맞는 이사를 선임해 기업 경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현대·기아자동차와 현대모비스에 집중투표제를 도입하라고 요구한 것도 이 때문이다.

현재 상법상 집중투표제 도입은 상장회사의 선택 사항이다. 정관을 통해 집중투표제를 배제할 수 있다. 정부가 집중투표제 도입 의무화를 추진하는 상황에서 국민연금이 집중투표제 찬성 근거를 만든 사실이 알려지면서 외국의 투기자본이 이를 악용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이에 대해 국민연금공단 관할 부처인 보건복지부는 “국민연금은 정당한 사유가 있을 때 지침대로 찬성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해명했다.

○ 국민연금 “투자하는 국내 주식 전 종목 공개”

복지부는 지난달 27일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를 열어 3분기(7∼9월)부터 보유 중인 국내 주식의 전 종목을 공개하기로 했다. 현재는 지분을 5% 이상 보유한 기업만 공개한다.

이 조치는 국민연금이 주식을 보유한 기업들을 공개해 이들의 의사 결정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는 기관투자가가 기업 의사 결정에 관여하는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으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국민연금은 7월 도입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지만, 국정과제에 포함돼 있는 만큼 도입될 가능성이 크다.

이와 관련해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장인 박능후 복지부 장관은 지난달 27일 “최근 대한항공 경영진 일가족의 일탈 행위, 삼성증권의 배당 사고로 인해 국민연금이 적극적인 주주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국민청원이 이어지고 있다”며 “독립적인 주주권 행사를 통해 기금의 수익성을 높이는 것이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의 의의”라고 말했다.

또 국민연금은 30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찬성하라고 압력을 넣은 관련자들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 제기 여부를 검토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 재계, ‘연금 사회주의’ 현상 우려

일부 전문가들은 집중투표제와 스튜어드십 코드를 통해 주주의 목소리를 높이면 기업 가치와 수익률 증대로 이어질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재계에서는 집중투표제를 도입할 경우 연금 사회주의 현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교수는 “현재 국민연금의 거버넌스는 전문성과 독립성이 부족하고 정부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이런 상황에서 국민연금이 경영에 개입하면 연금 사회주의로 흐를 수 있다”고 말했다.

유정주 한국경제연구원 기업혁신팀장은 “미국과 일본이 의무화했다가 부작용이 나타나자 1960, 70년대 미국 7개주만 제외하고는 도입 여부를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고 강조했다.

:: 집중투표제 ::

기업이 2명 이상 이사를 선출할 때 3% 이상 지분을 보유한 주주가 요청하면 표를 많이 얻은 순서대로 이사를 선출하는 제도. 주주가 원하는 후보에게 투표권을 몰아줄 수 있어 기업의 경영권이 흔들릴 소지가 있다.

:: 스튜어드십 코드 ::

기관투자가가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집사, 즉 스튜어드처럼 기업의 의사 결정에 적극 참여하고 그 결과를 보고하도록 하는 의결권 행사 지침.

강유현 yhkang@donga.com·김윤종 기자
#국민연금#집중투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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