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독살’ 정보에 격분한 이종일-손병희, 거국적 봉기 결의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4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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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기획]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제5화> 첩보

서울 종로구 조계사 인근 독립운동가 옥파 이종일 선생의 동상에서 내려다본 옛 보성사 터. 1919년 당시 보성사 사장이던 선생은 
천도교 인쇄소인 이곳에서 ‘기미독립선언서’ 2만 장을 인쇄해 전국 각지에 배포해 3·1운동의 발판을 마련했다.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서울 종로구 조계사 인근 독립운동가 옥파 이종일 선생의 동상에서 내려다본 옛 보성사 터. 1919년 당시 보성사 사장이던 선생은 천도교 인쇄소인 이곳에서 ‘기미독립선언서’ 2만 장을 인쇄해 전국 각지에 배포해 3·1운동의 발판을 마련했다.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1918년 11월 20일 국내 비밀 항일결사체인 천도구국단(天道救國團)을 이끄는 이종일(1858∼1925)의 마음은 착잡했다. 단원으로부터 “(만주의) 중광단원(重光團員) 39명이 우리보다 앞서서 무오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려 한다”는 첩보를 듣고 나서였다. 육척장구(六尺長軀)의 이종일은 고개를 푹 숙이고 “우리는 무얼 했는가. 망설임으로 이같이 낭패지경이 된 것”이라며 장탄식을 했다.(이종일 ‘묵암비망록’)

중광단은 ‘만주의 전설’이자 독립군의 영웅인 서일(1881∼1921)이 이끄는 항일무장단체였다. 만주 지역 대종교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민족종교 조직이기도 했다. 이종일의 천도구국단 역시 무기와 군자금까지 비축해놓은 항일 결사단체였다. 단원들도 민족종교인 천도교 교인이 대다수였다.

활동 주무대가 국내와 해외의 차이가 있을 뿐, 두 단체는 선의의 경쟁의식도 없지 않았을 터다. 천도구국단장 이종일로서는 해외의 중광단에 독립선언의 선수를 뺏긴 것이 무엇보다도 가슴 아팠다.

○ 천도구국단 결성

충남 태안군 원북면 이종일 선생 생가 인근에 세워진 기념관. 태안군청 제공
충남 태안군 원북면 이종일 선생 생가 인근에 세워진 기념관. 태안군청 제공
천도구국단은 중광단에 비해 규모나 인원 면에서 다소 뒤처졌다. 그러나 국내 최대 종교단체인 천도교를 뒷배로 삼아 정보 수집력이 뛰어났던 것으로 평가된다. 대종교의 중광단 세력이 주축을 이룬 대한독립의군부가 지린(吉林)에서 국외 민족지도자 39명의 이름으로 대한독립선언서 발표를 준비하고 있다는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한독립선언서는 정작 1919년 2월에 발표됐지만 1918년(무오년)부터 준비됐기 때문에 후대에 ‘무오대한독립선언서’로도 불리게 됐다. 이는 전적으로 이종일이 남긴 일기체 형식의 ‘묵암비망록’에 의한 것이다.

이종일은 1910년 자신이 운영하던 순한글신문인 ‘제국신문’이 폐간된 후 천도교 지도자 손병희(1861∼1922)를 기회만 되면 찾아갔다. 호걸풍의 손병희에게 “천도교가 선도해 제2의 동학혁명으로 독립을 되찾자”고 집요하고도 끈질기게 요청했다. 그는 1919년 2월 도쿄의 2·8독립선언서와 만주의 대한독립선언서 발표 훨씬 이전부터 국내에서 민중 봉기 등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주도해야 한다고 주창해온 것이다.

그가 1914년 8월 천도교 소속 인쇄소 보성사 내에 천도구국단을 결성한 것도 민족 봉기 운동을 조직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였다. 이종일은 천도구국단의 명예총재에 손병희를 추대한 다음 자신은 단장으로 취임했다. 산하에 부단장(김홍규), 총무(장효근), 섭외(신영구), 행동대장(박영신) 등을 두고 단원 50여 명으로 조직을 꾸렸다. 자신이 사장으로 재임하고 있는 보성사의 사원들이 주축을 이루다 보니, 보성사는 인쇄소로 위장한 비밀결사체로 변신했다. 후일 수만 장에 달하는 3·1독립선언서가 일제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도 보성사에서 무탈하게 인쇄, 배포될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배경 때문이다.

천도구국단은 상하이의 비밀결사집단이자 국내외 정보수집기관 역할을 한 동제사와도 성격이 유사했다. 동제사 수장 신규식이 그랬던 것처럼, 단장 이종일은 천도구국단의 섭외부를 통해 지속적으로 국제 정세 수집과 분석 등에 심혈을 기울였다. 물론 이를 국내 독립운동에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이종일 자신이 정보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숙지하고 이용할 줄 아는 정보맨이기도 했다. 그는 1882년 8월, 24세의 창창한 나이에 수신사 박영효의 사절단 일원이 돼 일본으로 건너가 개화된 문화를 일찌감치 체험한 바 있다. 1898년에는 ‘제국신문’을 창간해 사장 겸 기자로 활동하면서 정보를 직접 다뤄 본 경험도 있다. 게다가 여러 차례 일제에 의해 투옥되면서 경찰의 감시망을 뚫고, 그 예봉을 피하는 방도까지 능수능란하게 구사했다.(‘묵암비망록’ 1917년 6월 1일)

○ 거사 택일과 좌절

마침내 천도구국단의 소원이 이뤄졌다. 1918년 9월 9일에 천도교가 주축으로 나서 독립시위 거사를 결행하기로 했다. 그간 시위로 인해 수많은 인명이 희생당할 것을 염려해 쉽게 결정을 내리지 않았던 지도자 손병희가 재가한 것이다. 단, 각계각층이 참여하는 ‘대중화’, 각 방면에서 추진하고 있는 독립운동 세력의 ‘일원화’, 그리고 ‘비폭력화’란 3대 원칙에 입각한 민중운동이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었다.(‘묵암비망록’ 1918년 5월 6일) 1919년 3·1운동의 비폭력 평화주의는 여기서 잉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거사 날짜는 천도구국단의 면밀한 정세 분석 끝에 택일(擇日)한 것이었다. 당시 일본은 자국 열도의 쌀 소동 사태를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일본 국내에서 쌀 도매업자들과 지주들의 매점매석으로 쌀값이 폭등하자 분노한 군중이 폭동을 일으켰던 것. 1917년 초에 15엔 하던 현미 1섬 가격이 이듬해인 1918년 7월엔 30엔으로, 8월에는 41엔까지 치솟자 견디지 못한 하층민들이 싸전을 부수는 등 전국 각지에서 소동을 일으켜 치안이 마비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이종일은 일제가 자국 문제로 정국이 혼란스러운 틈을 이용해 기습적으로 거사를 하면 성공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천도구국단 단원들은 1910년 국권 피탈 이후 일제의 한국인에 대한 차별적 대우로 분노가 쌓인 노동자, 농어민, 상인 등을 동참시키는 준비도 끝내뒀다. 위급할 경우를 대비해 무기와 군자금도 지속적으로 확보해 놓고 있었다.

이종일은 일제의 헌병경찰 통치를 벗어나는 길은 무력밖에 없다고 믿었다. ‘제국신문’ 시절부터 이종일과 호흡을 함께 해온 장효근, 신영구 등도 이에 뜻을 같이했다.

“손의암(손병희)은 원칙적으로 무장세력 배양을 반대하지만 일단은 (무기를) 구입해 두든지 일본 헌병경찰 것을 절취해다가 은닉해 두는 방법도 있을 것이오. 겉으로는 항상 평온한 척하면서 일을 계속 진행시키시오.”(‘묵암비망록’ 1913년 11월 18일)

이종일의 지시에 따라 1916년 4월 보성사의 비밀창고에는 일본식 장총 10여 정, 실탄 200발, 군자금 600여 원이 비축돼 있었다. 낌새를 눈치챈 일본 형사들이 이종일의 집과 보성사 주위를 기웃거리고 미행을 붙였지만 발각되지 않았다. 이종일은 총 100정, 군자금 10만 원을 목표로 보성사 비밀창고를 계속 채워 나가고 있었다. 지도자 손병희의 지침대로 평화적이고 비폭력적인 시위를 전개할 것이나 여차하면 무력항쟁을 하리라는 게 정보맨 이종일의 속내였던 것이다.

훤칠한 키에 한복 차림을 즐기는 그는 선비이자 학자였지만 독립에 관한 일만큼은 열혈 투사였다. 그러나 이종일이 천도교 내부에서조차 과격파라는 낙인을 감수하면서까지 추진한 1918년 9월 9일의 거사는 좌절되고 말았다.

손병희 등의 주도로 구한국(舊韓國)의 고관(高官) 출신이거나 원로급 인사들에 대한 거사 동참을 교섭했으나 지연되고, 민중 동원력이 미숙했던 데다, 선언서를 쓰기로 한 최남선이 기간에 맞춰 글을 완성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종일이 끝내 성공시키지 못한 거사에 아쉬워하던 참에, 만주에서 중광단의 독립선언 발표 얘기를 들었으니 그 좌절감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앞서 이종일은 1916년에도 민중운동을 위해 사회 원로들을 규합하고자 했다. 당시 천도구국단 단원들은 원로급 인사인 한규설, 이상재, 윤용구, 김윤식, 박영효, 남정철 등을 일일이 찾아가 민중운동의 선봉에 나서달라고 부탁했다. 오직 이상재만이 협조 의사를 보였을 뿐, 나머지 원로들은 다 거절했다.(‘묵암비망록’ 1916년 3월 3일)

○ 고종 독살 사건으로 다시 일어서다

1919년 해가 바뀌었다. 실의에 빠졌던 이종일의 천도구국단이 다시 분주해졌다.

“어제(1월 21일) 고종이 일본에 의해 독살당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대한인(大韓人)의 울분을 터뜨리게 하는 일대 요건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민중시위 구국운동은 이제 진정한 민중으로 성숙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동안 몇몇 국민을 만나니 전부 고종 황제 독살 건으로 격분, 절치부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야말로 우리의 숙원이던 민족주의 민중운동은 본격화될 것이다. 이 운동에 아니 참여할 자 있겠는가.”(‘묵암비망록’ 1919년 1월 22일)

이종일은 고종의 사망을 처음부터 ‘독살’로 규정하고, 이는 민족운동의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다. 고종 독살 소식은 천도구국단의 정보망이 가동한 결과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고종 황제 사인(死因)에 대해선 일제 측에 의한 자연사 또는 뇌일혈사 설과 한국인들이 제기한 독살설 등 온갖 추측이 나돌았다. 그런데 천도교 수장 손병희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국민대회(國民大會) 소집을 포고하는 격고문(檄告文)을 즉시 발표했다. 1919년 1월 총 616자로 발표된 격고문의 내용은 이러했다.

“우리 고종 황제의 서거 원인을 알고 있습니까, 모르고 있습니까. 평소 건강하시옵고 또 병환의 소식이 없었는데 평일 밤 궁전에서 갑자기 서거하시니 이 어찌 상식적인 이치이겠습니까.…황제의 식사를 받드는 두 명의 궁녀에게 부탁해 밤에 황제가 드시는 식혜에 독약을 섞어 잡수시게 드리니 이를 드신 황제의 옥체가 갑자기 물과 같이 연하게 되고 뇌가 함께 파열하셨으며 구규(九竅·인체 내 9개의 구멍)에 피가 용솟음치더니 곧 세상을 떠나셨소이다. 곧 두 명의 궁녀도 위협하여 나머지 독약을 먹여 처참히 죽게 하고 입을 틀어막았으니 차마 저 왜적의 마음이 점점 더 우쭐해질 수 있겠습니까?”

격고문은 또 일제의 간계에 의해 고종이 독살됐다고 명시했다. 일제가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민족은 일본의 어진 정치에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여 갈라져서 따로 서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증명서를 제출하기 위해 고종에게 승인을 강요했으나, 고종이 이를 거부하자 죽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오늘날은 세계가 개조하고 망한 나라가 부활하는 좋은 기회이므로 2000만 동포가 봉기하고 궐기하자고 독려했다.

이처럼 손병희는 일제 강점 치하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덕수궁 함녕전의 ‘구중궁궐 사건’을 마치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자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이 내용은 천도교의 지하비밀신문 ‘조선독립신문’에도 소개됐다. 이는 대한제국의 궁궐 일에 대해 손병희가 항상 정보를 입수하고 그에 대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이현희 ‘3·1혁명, 그 진실을 밝힌다’) 손병희는 천도교 내부의 비밀정보집단인 천도구국단 혹은 천도교 인맥을 통해 진상을 파악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종일은 고종의 독살로 민중 사이에 봉기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후 1919년 2월 15일 손병희를 찾아갔다. 이종일은 일본 도쿄에서 2월 8일 학생들의 독립선언 발표가 있었다고 보고했다. 손병희가 이종일에게 말했다.

“어린 학생들이 오히려 우리보다 월등하구려. 묵암(이종일)의 오래전부터의 민중시위 운동을 속히 결단하지 못했음이 민망할 뿐이오.”

손병희와 이종일은 다시 거사를 일으키기로 결의했다. 국내 전반적인 분위기도 점점 고조돼 갔다. 국내 대표적 종교인 천도교 기독교 불교 등이 손을 맞잡고, 도쿄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으로 크게 자극받은 국내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동참하고, 중앙학교와 보성학교 등 교육계의 쟁쟁한 인사들의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 주요 등장인물


이종일:
1858년 충남 태안 생. 1898년 한글신문인 ‘제국신문’ 창간, 대한제국민력회 결성, 흥화학교 설립 등 민족교육 운동에 앞장섬. 1905년 천도교의 보성학교 초대 교장, 1910년 보성사 사장을 지내며 1914년에 천도구국단을 조직함. 1919년 3·1독립선언서를 인쇄했고, 민족대표 33인으로 일제에 체포됨. 1922년 출옥 후 제2차 독립선언서(자주독립선언문)를 발표하다가 일경에 압수당했고, 1925년 단식으로 순국했다. 향년 67세.


손병희:
1861년 충북 청원 생. 1882년 동학에 입문해 1897년 동학 제3대 교주로 취임.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한 후 천도교 내 친일세력을 제거한 후 민족운동에 앞장섬. 1919년 3·1운동의 주모자로 체포돼 옥고를 치르다 1922년 병사함.

서일: 1881년 함북 경원 생. 1912년 중광단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펼침. 1919년 3·1운동 후 중광단의 후신인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를 조직해 일본군을 상대로 무장투쟁을 펼침. 북로군정서의 총재로 김좌진 등과 함께 청산리대첩에서 승리를 거둠.
#3·1운동#독립운동#역사#항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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