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세상/오성윤]내가 ‘관용할’ 수 없는 것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4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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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윤 잡지 에디터
오성윤 잡지 에디터
이런 문구를 읽을 때면 공연히 기분이 좋아진다. “이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으로 본 매체의 견해와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곱씹을 여지가 있어 동의하지 않는 논리에도 목소리를 준다니. 이런 세련된 태도를 두고 ‘똘레랑스’, 즉 관용이라 하던가. 원고 주제를 미리 주지하고자 전화를 걸었을 때 이 코너 ‘2030세대’의 담당 기자는 이렇게 대꾸했다. “코너 특성이 있으니 그냥 자유롭게 써주세요. 앞으로도 미리 알려주실 필요 없고요.” 와우. 그렇단 말이지. 통화에 감명 받은 나는 자세를 고쳐 앉아, 이내 주제를 바꿨다. 그리하여 오늘의 이야기는 이런 것이다. 이 코너의 ‘30’을 맡고 있는 내겐 세상에 관용할 수 없는 말이 참 많다는 것. 매체의 똘레랑스가 어째서 나의 편협함을 낳았느냐고? 사실 적잖이 청개구리 심보인 듯한데, 일종의 메타포로 읽히길 바란다고 답하겠다.

나는 장애인 특수학교 설립에 맞선다는 일부 지역 주민의 말을 관용할 수 없다. 국내 사례를 통틀어 장애인 관련 시설이 집값이나 치안에 악영향을 미친 전례가 없으니, 그들은 실상 장애인 자체를 혐오하고 있는 것이다. ‘님비’가 인류 보편적 현상이기는 하나 장애인 관련 시설을 혐오 시설로 파악한 예는 찾기 힘들다. 나는 일부 기독교인들이 성명, 집회, 행진에서 외치는 ‘동성애 반대’를 관용할 수 없다. 혹시 여태 누구도 그들에게 알려주지 않았을까 봐 고루한 설명을 남기자면, 개인의 정체성은 타인이 찬성하고 반대할 계제가 아니다. 나는 성폭력 피해자에게서 귀책사유를 찾으려는 일체의 논리를 관용할 수 없다. 그들은 ‘이런 말을 하고 다니다 구타를 당할 수도 있겠다’는 각오를 했을까? 각오했다면, 즉 ‘맞을 만한 사람’과 ‘성폭력 당할 만한 사람’이란 게 존재한다고 여긴다면 그는 현대 문명의 가장 큰 성취인 인권 개념을 미처 배우지 못한 사람이다. 각오하지 않았다면 그 논리는 명백한 여성혐오다.

한 사건으로 축약할 수 있겠다. 나는 강의실에서 벌어진 여성혐오적 발언에 대한 세간의 의혹 제기가 ‘표현의 자유’와 ‘학습권’에 대한 침해라는 한 대학 교수의 주장을 관용할 수 없다. 그 말은 ‘예술가의 에고 트립’과 ‘위악’, 그리고 ‘혐오발언’과 ‘표현의 자유’를 구분할 수 없다는 주장이나 마찬가지이니, 듣는 사람들을 바보로 여기는 것이 분명하다. 혹은 스스로 바보 흉내를 내고 있거나. 저들은 표현의 억압과 싸우는 투사들이 아니다. 장애인의, 성소수자의, 여성의, 노인의, 이민자의, 불리한 위치에 있는 이들의 존엄성을 마음껏 훼손하고선 웬일인지 그에 대한 비난, 즉 타인의 ‘표현의 자유’는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최소한의 PC(정치적 올바름)가 전제되지 않은, 오직 무제한적이기만 한 표현의 자유는 -작가 에밀 시오랑의 말을 빌어- ‘정신에 대한 폭행’일 뿐이다. 그러니 나는 감히, 그들의 자유를 감내하지 못하겠노라 선 그어야겠다.

첨언. 서두에 쓰인 ‘이 글은 본 매체와의 견해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문구는 사실 선의의 맥락에서만 쓰이지는 않는다. 누군가의 억측이나 폭언을 인용하고선 중립을 가장하는 의도로 쓰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니 나는 상술한 사람들의 발언을 주워섬기며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현실적으로’ ‘일리가 있는’ 같은 표현을 덧붙이는 사람도 신뢰치 않는다. 너무 깐깐하다고 할 지도 모르겠다. 다만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에게 더 높은 기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인터넷 기사 댓글을 볼 때, ‘단톡방’에 떠도는 ‘찌라시’를 볼 때, 우연히 식당 옆자리의 이야기를 들을 때. 혐오의 논리가 이토록 미세먼지처럼 만연한 세상에서, 나는 도무지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성윤 잡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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