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진영]여자처럼 일하고 승리하라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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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영화 ‘더 포스트’의 주인공은 메릴 스트립이 연기한 캐서린 그레이엄 여사(1917∼2001)다. 그가 발행인으로 있던 1971년 워싱턴포스트는 국방부 기밀문서를 보도해 정부가 질 줄 알면서도 베트남전을 끌어왔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이듬해엔 워터게이트 스캔들 특종으로 대통령을 사임시켰는데, 이는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1976년)이라는 영화로 제작됐다. 1971년 시기를 다룬 ‘더 포스트’가 이 영화의 프리퀄인 셈이다.

‘모두가…’에는 단역으로도 나오지 않던 여성 발행인이 ‘더 포스트’에선 주인공을 맡게 된 건 여권 신장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그레이엄의 젖꼭지를 탈수기에 넣어 돌려 버리겠다”는 정부의 협박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켜낸 여걸이다. 워터게이트 보도 후 대통령은 쫓겨났고, 워싱턴의 지방지는 세계적 권위지로 우뚝 섰으며, 그는 작은 탈수기와 젖꼭지 모형을 선물로 받아 목걸이에 걸고 다녔다.

하지만 영화에서도 현실에서도 그는 대찬 여장부가 아니라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중년 여성이었다. 아버지와 남편이 차례로 경영하던 신문사를 남편의 자살 후 떠안은 때가 1963년. 사람들은 살림만 하던 여자가 회사를 말아먹겠거니 했다. 스스로도 공격적인 인수합병으로 회사를 키웠던 남편의 카리스마를 흉내 낼 자신이 없었다. “아빠 의식하지 말고 엄마 방식대로 하라”는 딸의 격려를 따를 수밖에 없었는데 놀랍게도 이것이 성공으로 이어졌다.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남자들의 말을 듣기만 했다”는 그레이엄 여사는 발행인이 된 후로도 명령하기보다는 듣고 협조를 구했다. 월터 리프먼에게 자문해 벤 브래들리(톰 행크스 분)라는 걸출한 편집국장을 발탁하고, 워런 버핏을 멘토 삼아 재무를 배웠다. 사내에서도 직급을 가리지 않고 묻고 다니는 그를 보며 참모들은 “사장이 결정하면 그만”이라고 답답해했다. 그는 워터게이트 보도 후 발행인의 역할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가능한 한 모든 사람의 의견을 들었다. 난 믿고 도왔을 뿐이다.”

베트남전의 실상을 담은 극비문서 보도라는 어려운 결정을 내릴 땐 베트남에 파병된 큰아들의 편지가 힘이 됐다. 발행인이 된 후로도 사교 모임에 가면 남자들 자리엔 끼지 못하고 부인들과 어울려 아줌마 수다를 나누는 처지였다. 남자들이 공유하는 정치공학이나 국제정세엔 어두웠지만 “우리 아들(혹은 오빠)이 아직 베트남에 있다”는 여성들의 외침만큼 확신을 주는 건 없었다.

회사 경영에 익숙해진 후로도 독자 편지에 꼭 답장하고, 회사의 13개 노조가 파업할 땐 밤새워 배달용 신문을 포장하고 광고 의뢰 전화를 받았다. 경영진과 편집국이 기사냐 수익이냐를 놓고 따질 땐 ‘좋은 저널리즘이 좋은 비즈니스’라며 중재했다.

결국 수평적으로 소통하고 배려하는 통합의 리더십으로 그레이엄 여사는 부패한 권력을 무릎 꿇리고 언론 자유를 지켜냈다. 취임할 때 8400만 달러였던 회사 수익은 1991년 퇴임할 땐 14억 달러로 불어났다. 한때 ‘남자처럼 일하고 여자처럼 승리하라’는 책이 유행했는데, 그는 여자처럼 일하고 남자처럼 승리했다.

김광웅 서울대 행정대학원 명예교수는 21세기 리더의 덕목으로 권한의 80%만 사용하는 리더, 공부하는 리더, 자신을 의심하는 리더를 꼽았다. 자만을 경계하며 묻고 배우고 권한을 위임한 그레이엄 여사는 21세기 남녀 모두에게 필요한 리더십을 한 세기 먼저 실천했다. 영화 ‘더 포스트’와 퓰리처상을 받은 ‘캐서린 그레이엄 자서전’은 언론학뿐만 아니라 리더십 교재로도 훌륭하다.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
#리더#더 포스트#캐서린 그레이엄#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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