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중년 밀어내고… ‘동네 아재’ 뜬다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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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머리-주름에 아웃도어 패션… 적당히 서툴고 쓸데없이 진지
애잔한 생활밀착형 중년 캐릭터
드라마 영화 만화 주인공으로

꿈에 대한 미련은 여전한 반면, 상상하던 모습으로 나이 들지 못한 중년 캐릭터들이 최근 대중문화에서 공감을 얻고 있다. SBS 드라마 ‘키스 먼저 할까요’의 감우성. SBS 제공
꿈에 대한 미련은 여전한 반면, 상상하던 모습으로 나이 들지 못한 중년 캐릭터들이 최근 대중문화에서 공감을 얻고 있다. SBS 드라마 ‘키스 먼저 할까요’의 감우성. SBS 제공
듬성듬성한 흰머리, 눈가 주름, 면도하지 않아 지저분하게 자란 수염, 등산복에 등산스틱을 든 아웃도어 패션….

최근 SBS 드라마 ‘키스 먼저 할까요’에서 배우 감우성이 연기한 캐릭터 ‘손무한’의 안쓰러운(?) 로맨스남 이미지가 큰 호응을 받고 있다. 몇 해 전까지 멋진 외모와 재력, 매너까지 겸비해 ‘꽃중년’ 바람을 일으킨 중년 남성 캐릭터들과는 사뭇 달라졌다.

손무한은 한때 잘나가던 광고회사 대표였으나, 현재는 직원들에게 까칠한 쓴소리만 일삼아 ‘좀비’ ‘돈 먹는 하마’ ‘재수 없는 선배’ 소리를 듣는 꼰대다. 이혼이라는 인생의 쓴맛을 경험해 마음의 상처도 깊다. 홀로 사는 집 화장실에 갇혔다가 며칠 만에 구조되는 등 그의 일상은 어딘지 모르게 처량하다. 드라마 애청자라는 50대 직장인 고모 씨는 “어디에서나 있을 법한 적당히 서투르고 쓸데없이 진지한 아저씨”라며 “2006년 드라마 ‘연애시대’의 동진(감우성)이 그대로 나이 든 모습”이라고 말했다.

웹툰 ‘우리집 아재’의 김길수 캐릭터. 저스툰 제공
웹툰 ‘우리집 아재’의 김길수 캐릭터. 저스툰 제공
최근 이 같은 ‘생활밀착형 중년’이 주목받는 흐름은 드라마에 그치지 않는다. 만화나 영화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웹툰 플랫폼 ‘저스툰’에 연재하는 꼬까솜 작가의 만화 ‘우리 집 아재’ 주인공 김길수가 대표적이다. 그는 등산과 골프, 독서 등을 즐기는 허세 가득한 50대 가장이다. 아내의 주름과 뱃살, 딸의 진로에 대해 끊임없이 잔소리를 해대지만, 와이프나 딸이 없으면 혼자 끼니도 챙겨 먹을 줄 모른다. 돌아오는 건 가족의 빈축뿐이다.

영화 ‘염력’의 류승룡. NEW 제공
영화 ‘염력’의 류승룡. NEW 제공
1월 개봉했던 영화 ‘염력’에서 류승룡이 연기했던 신석헌도 마찬가지. 그는 행색이 추레하고 약간은 비겁하며 이기적인 아버지다. 미혼의 세련된 ‘꽃중년’이 여성의 백마 탄 왕자 판타지를 충족시켜주는 구도는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그 대신 현실에서 부닥치는 그 모습 그대로 연민을 이끌어낸다.

이는 지난해까지 대중문화계를 달궜던 생활밀착형 청년과 궤를 같이한다. ‘흙수저’ ‘미생’ 등이 대변하는 20, 30세대의 아픔에 주목하는 콘텐츠가 각광을 받았다면, 이제는 나이대가 확장돼 ‘열심히 살았는데도 잘 풀리지 않은’ 우리네 40대 이상 중장년이 주 무대에 올라선 셈이다. 이전까지 단역이나 조연에 그치던 캐릭터가 이젠 비중 있는 주연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전문가들은 이런 생활형 중년에 대한 관심이 커진 걸 두 가지 측면으로 해석한다. 먼저 ‘미투 운동’과 같은 페미니즘 사고방식이 대중문화로 급속도로 스며들었단 분석이다. 과거엔 ‘상남자’ 캐릭터를 긍정적으로 바라봤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난해 여성을 벽으로 몰아세우고 키스하는 일명 ‘벽치기’에 대중의 비난이 쏟아진 것도 같은 맥락이다. 김은영 대중문화평론가는 “상처가 있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상처도 보듬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라며 “기존 마초 캐릭터에 대한 반작용으로 상대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연민의 남성상이 지지를 받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중문화의 소비층이 고령화한 점도 무시할 수 없다. 한두 작품을 제외하고 20대 생활형 청춘을 다룬 드라마는 성적이 매우 부진했다. 결국 주 시청자의 눈높이를 맞추지 못했단 평가가 현장에선 나오고 있다. 공희정 대중문화평론가는 “최근 쏟아진 청년세대를 다룬 작품은 모두 중장년층의 시각에서 젊음을 바라보는 한계를 드러냈다”며 “특히 지상파 TV드라마는 40대 이상 연령에 맞는 작품이 더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

조윤경 기자 yunique@donga.com
#꽃중년#아재#중년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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