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세상/정성은]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폐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2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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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은 콘텐츠제작사 ‘비디오편의점’ 대표PD
정성은 콘텐츠제작사 ‘비디오편의점’ 대표PD
시집을 버렸다. 내려받은 영화를 지웠다. 이 작품들이 세상의 찬사를 받는 동안, 피해자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세상에 내 편은 아무도 없다고 느낄 때의 무력감. 그들이 겪었을 지옥에, 나의 ‘좋아요’도 한몫했을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다. 이제부터 엔딩 크레디트에 이런 문구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본 작품은 성폭력에 가담한 어느 배우도, 감독도, 제작진도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서지현 검사의 폭로 이후, 문화예술계 곳곳에서 ‘나도 당했다’는 성폭력 피해자들의 증언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언론은 이것을 할리우드를 따라한 ‘미투 운동’이라고 했다. 하지만 2016년부터 “#ㅇㅇ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은 이미 시작됐다. 다음은 그 리스트다 #문단_내_성폭력 #극단_내_성폭력 #직장_내_성폭력 #학교_내_성폭력 #영화계_내_성폭력 #의료계_내_성폭력. 여성이 성폭력을 당하지 않으려면 어느 곳으로 가야 할까?

예술학교에 다니는 친구는 말했다. “이러다 우리 학교 사라지겠어.” 술과 담배와 여성을 같은 선상에 놓던 선생과 선배들이 차례로 끌려갔다. (이제 우리 ‘님’자 좀 뺍시다.) 우리는 이 세계가 사라지길 간절히 빌었다. 하지만 쉽진 않을 거라고 했다. “혐의에서 자유로운 관계자도 있겠지. 하지만 어울리는 사람들이 성추행범인걸?” 방관자가 수혜자 되고, 수혜자가 가해자 되는 이곳에서 당신은 어디쯤에 속하는가?

기자가 된 친구는 물었다. “혹시 미투 관련해서 회사 내에서 여성을 배제시키는 사례가 있으면 제보해 줄 수 있을까?” 나는 멀리서 찾지 말라고 했다. “너희 회사에 룸살롱 회식 가는 선배들 앉혀놓고 인터뷰나 해라.” 언론사와 방송국일수록, 제보에 앞서 내부고발이 시급하다. 그런 의미에서 사내 성폭력 고발 미투 영상을 제작한 KBS 기자들의 용기는 대단하다. 조직이 적극적으로 내부고발을 독려해야 할 것이다.

피해자 호소를 넘어 가해자 처벌이 필요한 시점이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서 죄송합니다. 작품으로 보답하겠습니다.” 범죄를 저질렀는데 왜 작품으로 보답하나? 죗값을 치르자. 그리고 사과는 피해자에게 하자. 셀프 간증이나 언론과 팬들을 향한 공개 사과로 ‘퉁치지’ 말자. 피해자들에게 제대로 된 사과를 하고, 응당한 처벌을 받자.

미투가 넘쳐난다. 하지만 내 주위엔 여전히 성폭력을 당하고도, 미투 운동에 참여하지 못하는 친구들이 많다. 폭로는 짧고 인생은 길기 때문이다. 친구들이 당한 일을 들으면서도 ‘그런 일이 있었구나…. 힘내…’라는 말밖에 할 수 없을 때가 많다. 이토록 간절한 목소리를 함부로 진영논리에 가져가지 마라. 성폭력에 진보 보수 없다. 이제 겨우 목소리를 낸 여성들의 입을 막지 마라.

“연뮤덕(연극·뮤지컬 덕후) 여러분 이건 장기전입니다. 지치지 맙시다.” 인터넷 공간을 통해 팬들은 서로를 위로했다. “분노를 지속하는 게 힘들면 잠깐 쉬어도 됩니다. 일상도 잘 챙기고 에너지도 잘 배분하며 오래 버텨보아요.”

매일 터지는 폭로에 힘든 거 안다. 피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과정을 지나야 우리 사회는 바뀔 것이다. 겨우 조금 바뀔 것이다.

평화롭던 세계가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누구를 위한 평화였나? 한 남성 시인의 시를 인용해 제목을 달았다. 하지만 정정하려고 한다. 폐허가 된 것은 맞다. 하지만 더 이상 슬프지 않다. 이제 폐허에서 새로운 역사를 쓸 시간이다.
 
정성은 콘텐츠제작사 ‘비디오편의점’ 대표PD
#서지현 검사 폭로#미투 운동#피해자 호소#적극적인 내부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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