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성의 盤세기]1930년대 日 휩쓴 한류, 강석연의 ‘방랑가’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2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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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방열 농구협회장 모친 ‘첫 한류스타’

일제강점기 명가수였던 강석연(왼쪽)과 그의 일본 데뷔 음반이었던 ‘그리운 연기’. 김문성 씨 제공
일제강점기 명가수였던 강석연(왼쪽)과 그의 일본 데뷔 음반이었던 ‘그리운 연기’. 김문성 씨 제공
김문성 국악평론가
김문성 국악평론가
평창 겨울올림픽 폐회식 공연을 앞두고 온라인 공간이 시끌벅적합니다. 아이돌 그룹 엑소와 가수 씨엘의 공연 소식에 방탄소년단 팬들이 청원을 했다는 뉴스도 들립니다. 유명 스포츠 스타들도 케이팝 팬임을 당당히 밝히는 등 케이팝 중심의 한류 위력을 실감하는 올림픽입니다. 언제부터 대중음악계에 한류 현상이 존재했을까요?

2012년 스포츠계 거물급 인사의 폭탄선언으로 대중음악계가 충격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농구 감독의 전설인 방열 대한농구협회 회장(77)이 출생의 비밀(?)을 밝힌 건데요. 일제강점기 명가수 강석연(1914∼2001)이 자신의 어머니였다는 것입니다. 70년 이상 존재가 확인되지 않아 온갖 소문만 무성했던 강석연에 대한 궁금증이 풀리는 순간이었습니다.

강석연은 ‘황성 옛터’를 부른 이애리수와 함께 초기 한국 대중음악계를 이끌었습니다. 특히 ‘방랑가’는 전국을 강타하며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그 인기는 한국을 넘어 일본에까지 퍼졌습니다. 1932년 채규엽의 일본 데뷔곡이 ‘방랑가’였으며, 1933년에는 마쓰야마 도키오, 고타니 사유리, 오쓰카 이치로 등 일본 가수들이 차례로 ‘방랑가’로 데뷔할 정도였습니다.

강석연은 어떻게 한류 스타가 될 수 있었을까요? 1932년 강석연과 이애리수는 음반 취입을 위해 도쿄의 빅타레코드사를 방문합니다. 최근 빅타레코드사의 관련 기록이 발견돼 소개합니다.

“이애리수, 강석연 두 여성은 조선의 일류가수이자 빅타 전속 예술가입니다. 이번 봄 도쿄 칸다에 있는 빅타 녹음실을 방문해 조선음악을 취입했는데, 그 가운데 훌륭하고 멋진 두 곡(강석연 ‘영객’과 이애리수 ‘고요한 장안’)이 있었습니다. 우연히 시인 사이조 야소가 이 노래를 듣고 찬탄을 했는데요. 바로 이 두 여성을 위해 작사를 하고, 이후 4∼5일간 일본어 발음을 연습해 취입한 것이 ‘그리운 연기’와 ‘풋사랑’ 두 곡입니다. 일본어가 익숙하지 않아 두 가수의 사투리가 들리는 듯하지만 노래에 대한 느낌은 나무랄 데가 없으며, 일류 가수들로 지금 급작스러운 유행의 큰 돌풍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국의 여가수들은 일본 무대에서 완벽하게 데뷔합니다. 이것이 한류 스타의 첫 탄생입니다. 물론 채규엽이 2개월 앞서 일본에서 데뷔합니다. 하지만 한국 이름 대신 하세가와 이치로라는 일본명으로 활동한 데다, 강석연의 방랑가로 데뷔한 한계가 있었으며, 인기도 면에서도 강석연, 이애리수를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강석연은 1940년 언론인과 결혼하면서 연예계 생활을 접고, 후에 미용실을 운영하며 평범하게 살다가 2001년 생을 마감합니다. 고교 시절 우연히 다락방에서 마이크 앞에 서 있던 강석연의 활동사진을 보게 된 아들 방열 감독. 그렇게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최초의 한류 스타 어머니 강석연의 생애를 증언하는 자리를 가졌던 겁니다.
 
김문성 국악평론가
#평창 겨울올림픽#폐회식 공연#강석연#황성 옛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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