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2차 ‘고난의 행군’은 로드맵에 없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2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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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기자
주성하 기자
한국이 핵미사일 앞에서 무방비라면, 북한의 최대 약점은 체제 위기다. 근래에 한반도라는 그라운드에서 한미연합팀과 북한팀 사이에 벌어진 게임은 늘 반(半)코트 싸움이었다.

북한은 상대의 약점을 노린 극단적 공격 전술로 나왔고, 한미는 방어에만 급급했지 상대의 약점을 노려 반격하지 못했다.

그런데 한미연합팀 총괄감독이 버락 오바마에서 도널드 트럼프로 바뀌면서 판세가 바뀌었다. 트럼프는 상상 이상으로 북한의 약점을 파고드는 강공 작전을 구사했다. 북한의 최대 스폰서인 중국을 힘으로 압박해 지원을 못 하게 만들었다. 몇 년 안으로 북한은 굶주려 허우적대다 쓰러질 판이다.

북한팀 감독 김정은은 상황 판단이 빨랐다. 그는 공격 모드에서 방어로 급히 전술을 바꾸었다. 이대로 가면 팀이 버티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평창에 대규모 화해 대표단을 파견하고, 한국팀 문재인 감독을 평양에 초대한 것은 양 팀의 공수가 바뀐 상징적 사건이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감독직을 세습한 김정은은 본인의 능력인지, 아버지가 물려준 코치진의 능력인진 알 길이 없지만, 지금까진 자기 팀을 잘 이끌어왔다.

부임 첫해에 선수 사기 진작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희망을 심어주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더는 허리띠를 조이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선언한 뒤 젊은 부인의 팔짱을 끼고 나와 ‘나는 가족을 중시하는 젊은 남자이니 믿어보라’는 메시지를 던졌다. 잇따른 경제와 농업 개혁 조치 선언으로 기대감도 끌어올렸다.

이듬해 장성택 처형을 통해 그는 ‘북한의 왕은 나’라고 대내외에 과시했다. 마치 잉글랜드의 위대한 축구 감독 알렉스 퍼거슨 경이 데이비드 베컴이라는 걸출한 스타플레이어를 걷어차 ‘맨유는 퍼거슨의 팀’임을 보여줬듯이 말이다. 물론 코치진이 ‘강력한 2인자를 두고 장기 집권한 독재자는 역사에 없다’고 조언해 주었겠지만, 대단한 권력의지가 아니라면 자신을 돌봐주던 고모부를 처형하긴 어렵다.

김정은이 집권 6년 내내 핵과 미사일 개발에 매달렸던 것도 ‘가진 것 없어 무시당하는 수모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지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한미가 가장 두려워하는 핵미사일을 손에 넣고 종신 집권을 위한 통 큰 거래를 하겠다는 것이 그의 장기적 계획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계획은 재작년 말부터 예상치 못하게 어긋나기 시작했다. 미국인들조차 예상치 못했던 트럼프의 집권을 김정은이 미리 알아챘을 리 만무하다.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이 거래 상대가 됐다면 김정은은 “그것도 이미 내 로드맵에 있었어”라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트럼프가 집권 후에 보여준 저돌성은 더욱 놀랍다. 중국이 북한의 3대 돈줄(석탄, 수산물, 의류임가공)을 끊고, 원유 지원도 대폭 줄일 거라고 예상한 전문가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 어려운 미션을 트럼프가 해냈다. 이제 와선 트럼프가 북한 공격 명령을 내리지 못할 것이라 장담할 수 있는 전문가도 점점 줄고 있다.

조급해진 김정은은 지난 1년여 동안 눈과 귀를 다 틀어막고 그야말로 ‘미친 듯이’ 핵미사일 완성에 매달렸고, 2017년이 지나가기 전에 ‘핵 무력의 완성’을 부랴부랴 선언했다. 그러곤 새해 벽두부터 핵미사일 완성 이후로 세워둔 로드맵상의 ‘흥정’ 단계로 넘어가려 한다.

하지만 여유롭게 배를 내밀며 하려던 흥정이, 숨을 헐떡이며 시간에 쫓겨서 하게 된 이상 제대로 될 리는 만무하다.

김정은의 장기 플랜에는 두 가지가 없었다. 첫째는 트럼프 당선, 둘째는 고난의 행군이다.

중국이 대북 압박에 동참하자 북한 내부에선 곧바로 비명이 터져 나오고 있다. 연료가 없어 군부대가 기동할 수 없고, 고위 간부와 장성조차 추위에 떨고 있다. 춘궁기로 가면 식량 가격이 치솟아 기근이 다시 북한을 덮칠 가능성도 높다. 그러면 김정은을 ‘신뢰할 수 없는 사기꾼’으로 비난하는 내부 불만이 치솟아 역심(逆心)이 꿈틀거릴 것이고, 김정은이 제일 두려워하는 체제 위기가 현실화된다.

약점을 정확히, 매우 아프게 공격당해 순식간에 수세에 몰린 김정은은 급히 상황 반전에 나섰지만, 문제는 거래 조건이 달라졌다. 이제 김정은이 부르는 핵미사일 값은 단순 호가일 뿐, 실거래 가격이 될 수 없다. 북한이 거래를 거부하면 그건 곧 고난의 행군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김정은은 자기 처지에서 어떤 것이 최선일지를 잘 판단해왔다. 만약 김정은이 핵미사일을 부둥켜안은 채 몇 년 정도는 고난의 행군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판단한다면, 이는 최후의 오판이 될 확률이 매우 높다. 1990년대 중반 1차 고난의 행군을 체험했고 평생 북한을 지켜본 나의 판단으론, 북한은 절대 고난의 행군을 또다시 견뎌내지 못한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북한#한미연합#김정은#도널드 트럼프#대북 압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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