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Next’ 10대 분노에 놀란 트럼프 “자동발사 범프스톡 금지”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2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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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후 총기 장비 규제 첫 언급

20일 미국 플로리다주 의회는 반자동소총과 대용량 탄창을 금지하는 법안 표결에 들어갔다. 의원들은 14일 발생한 파클랜드의 스톤맨 더글러스 고교 총기 난사로 사망한 17명의 희생자를 기리는 기도로 표결을 시작했다. 결과는 36 대 71로 부결이었다. 공화당이 장악한 의회는 이번에도 총기 규제 여론을 외면했다.

“어떻게 ‘노(No)’ 버튼을 바로 누를 수 있나요.”

실낱같은 기대를 걸고 주의회로 향했던 스톤맨 더글러스 고교 학생 수십 명은 허탈함과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2학년 셰릴 아쿠아로리(16)는 CNN의 ‘앤더슨 쿠퍼 360’에 출연해 “너무 비정하다”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다음에 또 총기 난사가 생긴다면 그들의 실수”라고 분노했다.

반복되는 학교 총기 난사에도 총기 규제를 주저하는 정치권에 대한 미국 청소년들의 분노가 끓어오르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후 처음으로 총기 장비에 대한 직접 규제에 나섰다.

○ 여론에 밀린 트럼프, 첫 총기 장비 규제

트럼프 대통령은 20일 ‘범프스톡(Bump-Stock·반자동소총을 자동소총으로 개조하는 장치)’ 금지 규제를 마련할 것을 제프 세션스 법무장관에게 지시했다. 플로리다 고교 총기 난사 사건을 계기로 총기 규제 여론이 다시 끓어오르자 지난해 58명의 목숨을 빼앗은 라스베이거스 총기 난사범 스티븐 패덕이 사용했던 범프스톡에 대한 규제를 넉 달 반 만에 진행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총기 난사 때마다 총격범의 정신 문제를 거론하거나 “미연방수사국(FBI)이 러시아 스캔들에 너무 몰두해 있다”고 주장하는 식으로 초점을 비켜갔다. 하지만 총기 규제 논란이 장기화돼 11월 중간선거에까지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보이자 서둘러 봉합에 나선 것으로 풀이된다. 워싱턴포스트(WP)와 ABC뉴스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62%는 ‘트럼프 대통령이 총기 난사 사건을 막기 위해 충분한 일을 하지 않고 있다’고 응답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총기 구매자의 범죄 기록 조회 강화 법안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힌 데 이어 플로리다 고교 총기 난사범이 사용한 AR-15 반자동소총의 구매 연령을 18세에서 21세로 높이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세라 허커비 샌더스 백악관 대변인은 이날 정례 브리핑에서 “(연령 조정 방안이) 논의 테이블에 올라 있다”고 밝혔다.

○ “AR-15 규제” vs “교사 무장해야” 엇갈린 해법

학생들은 ‘죽음의 무기’로 불리는 ‘AR-15’ 소총 금지 등 근본적인 총기 규제를 요구하고 있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미국 내에서 500만 정 이상이 팔린 AR-15는 최근 6년간 발생한 총기 난사 사건에서 5번이나 등장했다. 가볍고 반동이 적어 초보자도 사용할 수 있는 데다 철제 헬멧을 관통할 정도로 위력이 세다. 그런데도 플로리다주에선 18세만 넘으면 살 수 있다.

학생들은 이런 가공할 무기의 판매를 허용한 정치권에 분노하고 있다. 소셜미디어에서는 ‘다음 차례는 내가 될 수 있다’는 ‘#Willwebenext’ 캠페인이 시작됐다. 다음 달 14일엔 플로리다 고교 총기 난사 희생자 17명을 기리기 위해 17분간 행진하는 행사가, 24일엔 워싱턴 등 주요 대도시에서 학교 안전과 총기 규제를 요구하는 행진이 열릴 예정이다. 스톤맨 더글러스 고교 2학년생 앨릭스 윈드(17)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면 총격 사건이 일어난 교실 복도를 어떻게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총기 지지자들은 이 같은 학생들의 집단행동에 대해 “좌파에 휘둘리고 있다”거나 “학생이 아닌 배우가 주도하고 있다”는 음모론을 제기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 내에서는 교사들에게 총기 사용법을 교육시키고 총기를 보유하게 해야 한다거나, 퇴직 경찰 등을 학교 안전요원으로 배치하는 식의 ‘무장을 통한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 ‘콜럼바인 세대’ 등의 여론이 관건

트럼프 대통령의 강력한 우군인 전미총기협회(NRA)의 영향력도 만만치 않다. WP는 “트럼프 대통령이 겉으론 NRA의 어젠다를 넘어서지 않았지만 막후에선 불협화음을 낼 아이디어를 만지작거리고 있다”고 평가했다.

사건 직후 총기 규제 여론이 들끓다가 시간이 흐르면 사라지는 일이 반복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지 의사를 밝힌 총기 구매자 전과 조회 강화 방안은 2012년 샌디 훅 초등학교 총기 난사 이후 관련 법안이 발의됐다가 흐지부지됐다. 2017년에도 비슷한 일이 반복됐다. ‘자기 보호를 위해 무장할 권리’를 규정한 미국 수정헌법 제2조를 개정하지 않고 총기 소유를 근본적으로 막을 수 없는 데다 총기 회수도 현실적으로 어렵다.

여론도 미지근하다. WP와 ABC뉴스 조사에서 AR-15 같은 돌격용 소총에 대한 판매를 금지해야 한다는 의견은 50%로 반대 의견(46%)과 큰 차이가 없었다. 이 규제가 도입됐던 1994년엔 반대 의견이 80%였다. CNN은 ‘콜럼바인 세대’(1999년 콜럼바인 고교 총기 난사 사건에 영향을 받은 18∼34세 성인)의 총기 규제 찬성 여론(49%)이 전체 미국인(50%)보다 낮다고 지적했다.

뉴욕=박용 특파원 parky@donga.com

△범프스톡(Bump-Stock·사진)

반자동 소총인 AR-15를 분당 400∼800발 사격이 가능한 자동소총으로 개조하는 장치.

△AR-15

1958년 미국 아멀라이트가 개발한 반자동 소총. 미국에서 500만 정이 판매됨. 무게가 3.63kg으로 가볍고 반동이 작아 사격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도 쉽게 사용.
#트럼프#미국#총기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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