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스 절반 책임진 이승훈 ‘레전드의 품격’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2월 22일 03시 00분


코멘트

‘신-구 조화’ 빙속 男팀추월 은메달

한국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팀추월 대표 김민석 이승훈 정재원(왼쪽부터)이 21일 강릉 스피드스케이팅경기장에서 열린 결승에서 은메달을
 차지한 뒤 태극기를 들고 트랙을 돌며 환호하는 관중에게 답례하고 있다. 강릉=김종원 스포츠동아 기자 won@donga.com
한국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팀추월 대표 김민석 이승훈 정재원(왼쪽부터)이 21일 강릉 스피드스케이팅경기장에서 열린 결승에서 은메달을 차지한 뒤 태극기를 들고 트랙을 돌며 환호하는 관중에게 답례하고 있다. 강릉=김종원 스포츠동아 기자 won@donga.com
“제가 지금 빠지면 당장 장거리를 뛰어줄 선수들이 많지 않아요. (장거리) 명맥을 이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어요.”

지난해 10월 서울 태릉국제스케이트장. 5000m 대표 선발전에서 국내 최고기록을 세우며 우승을 차지한 이승훈(30)은 시상식 뒤 이 같은 고민을 털어놨다. 주력 종목인 매스스타트, 팀추월 외에도 5000m, 1만 m를 병행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었다.

8년 전 밴쿠버 올림픽에서 깜짝 메달(1만 m 금, 5000m 은)을 따내며 전 세계를 놀라게 한 22세의 청년은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의 미래를 걱정하는 위치에 섰다. 단거리, 장거리를 가리지 않고 대표팀 선수들에게 닮고 싶은 선배를 물으면 대부분 그의 이름이 나온다. 쇼트트랙에서 전향해 스피드스케이터로 올림픽 금메달을 일궈낸 이승훈의 성공 사례도 귀감이 되고 있다.

이승훈이 일명 ‘이승훈의 아이들’과 함께 한국 선수단에 올림픽 2회 연속 팀추월 은메달을 선물했다. 이승훈, 김민석(19), 정재원(17)으로 구성된 한국 남자 팀추월 대표팀(세계 랭킹 4위)은 21일 강릉 스피드스케이팅경기장에서 열린 결승에서 세계 랭킹 1위 노르웨이(3분37초32)보다 1.2초 늦은 3분38초52로 피니시 라인을 통과하며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금메달을 놓친 건 아쉽지만 자신이 말해온 책임감을 경기 내용으로 증명했다. 쇼트트랙 선수 출신으로 코너워크가 장점인 이승훈은 곡선 주로에서 팀 전체의 페이스가 떨어지지 않도록 후배들을 이끌었다. 이날 400m 트랙 8바퀴 중 절반인 4바퀴를 맨 앞에서 끌며 후배들의 페이스를 끌어올렸다. 이승훈이 앞에서 끌었던 4번째 바퀴에서는 0.19초까지 노르웨이에 앞서기도 했다.

끊임없는 자기 발전도 후배들이 그를 따르는 이유다. 이번 대회 5000m에서 이승훈은 6분14초15로 5위를 차지하며 8년 전 밴쿠버에서 은메달을 딸 당시 기록(6분16초95)을 넘어섰다. 1만 m에서도 12분55초54로 자신이 갖고 있던 한국 신기록을 새로 쓰며 4위를 했다. 주력 종목에 대비하는 경기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메달권에 근접했다. 지난해 2월 삿포로 겨울아시아경기에서는 한국 선수 최초로 4관왕에 올랐다. 그는 이에 앞서 지난해 2월 세계선수권대회 남자 팀추월 경기 도중 넘어져 스케이트날에 다리를 깊게 베였다. 8바늘을 꿰매고 통증이 가라앉지 않은 상태에서 아시아경기에 출전해 4관왕을 차지하는 투혼을 보였다. 그는 당시 “평창 겨울올림픽에서 만날 유럽 선수들에게 내가 쉬운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었다.

이승훈 개인으로서도 올림픽 세 대회 연속 메달이라는 영광을 달성하게 됐다. 지난해 6월 두솔비 씨(27)와 백년가약을 맺은 뒤 평창 올림픽을 위해 신혼여행까지 대회 뒤로 미뤘던 이승훈은 “꼭 메달을 따 신부에게 선물을 하고 싶다”는 약속을 지키게 됐다. 결혼 뒤 “얼굴 좋아졌다는 소리를 듣고 산다”던 이승훈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피었다. 경기 뒤 이승훈은 “목표는 금메달이었는데 좀 아쉽기도 하지만 많은 분들이 응원해 주셔서 최선을 다할 수 있었다. 남은 (매스스타트) 경기까지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동생들에게는 “든든히 뒤를 받쳐줘서 고맙다. 앞으로는 나보다 앞에서 더 잘 끌 수 있는 후배들이 되리라 믿는다”고 했다.

‘아이들’도 형을 도와 메달을 합작했다. 1500m에서 깜짝 동메달을 따냈던 김민석은 팀추월에서 이승훈이 앞으로 나설 때 맨 뒤에서 막내 정재원의 뒤를 받쳤다.

23일 남자 1000m에 출전하는 정재웅(19)의 동생이기도 한 정재원도 자신의 첫 올림픽에서 시상대에 올랐다. 지난해 대표로 선발된 정재원은 자신의 룸메이트이자 우상인 이승훈과 한국체대 쇼트트랙 경기장에서 함께 훈련하는 등 코너워크 훈련에 집중했다. “나중에 커서 운전도 승훈이 형처럼 부드럽게 하겠다”고 말할 정도로 ‘승훈 바라기’인 그는 8년 전 자신의 우상이 그랬듯 선수 생활에서 잊지 못할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제가 부족했던 부분을 형들이 많이 채워줬다. 다음 올림픽에서는 더 힘이 돼서 금메달을 노려 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들은 메달리스트들에게 주는 ‘어사화 수호랑’을 관중석에 던지며 환호에 답했다. 이승훈은 이번 올림픽에서 첫선을 보이는 남자 매스스타트에서 24일 금메달에 도전한다.

강릉=강홍구 windup@donga.com·김배중 기자
#평창올림픽#팀추월#스피드스케이팅#이승훈#은메달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