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국가대표’의 그들, 올림픽 마지막 비행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2월 9일 03시 00분


코멘트

[평창올림픽 9일 개막]최서우-김현기의 27년 도전 인생

살을 에는 칼바람 속에서 발을 동동 굴러가며 스키점프대 위에 선 최서우(36)를 응원하는 한국 팬들이 눈에 띄었다. 이날 최서우는 예선전에 나선 57명의 선수 중 가장 먼저 스키점프대 위에 섰다. 아파트 15층 높이(약 47m)에서 89m를 날아간 최서우는 안방 팬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 평창 올림픽에서의 첫 비행을 끝마쳤다.

영화 ‘국가대표’의 주인공 최서우 김현기(35·이상 하이원)가 8일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올림픽 비상을 시작했다. 1991년 ‘인간새’를 꿈꾸며 스키점프에 입문했던 둘은 어느새 30대 후반으로 접어들어 사실상 이번이 그들의 마지막 올림픽 무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최서우와 김현기는 이날 오후 평창 알펜시아 스키점프대에서 열린 노멀힐 남자 개인 예선전에서 각각 94.7점(39위)과 83.1점(52위)을 받았다. 최서우는 본선에 진출할 수 있는 50위 안에 들었지만, 김현기는 예선 탈락했다.

둘은 1996년 나가노 대회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겨울올림픽에 참가해 왔던 한국 스키점프 1세대. 이들과 동고동락해 왔던 최흥철(37)은 이번 대회 출전권을 따내지 못했고, 강칠구(34)는 2016년 지도자의 길을 걸으면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이에 따라 스키점프 현역 선수로 남아 있는 최서우 김현기의 올림픽 행적은 한국 겨울올림픽의 새 역사로 기록됐다. 여름·겨울을 통틀어 6회 연속 올림픽 출전을 기록한 선수는 남자 스피드스케이팅의 이규혁(40)이 유일하다.

이들이 20년 넘게 올림픽 비행을 이어 올 수 있었던 것은 오랜 인고의 세월을 이겨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보통 한 명의 스키점프 선수를 육성하는 데 최소 5년 이상이 걸린다. 이 시간을 이겨내야 스키점프대에서 점프를 할 수 있다. 어린 나이에서부터 세간의 이목을 끄는 ‘천재 선수’가 이 종목에서 유독 드문 이유도 이 때문이다. 더군다나 한국은 스키점프가 비인기 종목이라 최서우 김현기는 사람들의 관심 밖에서 외롭게 성장통을 앓아야만 했다. 1991년 스키점프에 입문한 이후 최서우와 김현기는 10여 년을 암흑 속을 개척해 나가야 했다.

김현기가 어두운 하늘을 가르며 경기를 치르고 있다. 평창=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김현기가 어두운 하늘을 가르며 경기를 치르고 있다. 평창=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열정과 패기 하나로 시작하긴 했지만 변변한 훈련 시설도, 장비도 없이 뛰어든 그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2008년 한국에 스키점프 실업팀(하이원)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늘 생계비 걱정이 가득했다. 한 달에 6만 원밖에 안 되는 훈련비로 근근이 생활했던 그들이다. 돈이 없어 찢어진 점프복을 손수 기워 가며 경기에 나섰다. 막노동을 전전하기도 했고, 놀이동산에서 인형 탈을 쓰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벌어야만 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끝내 ‘인간새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최서우와 김현기는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겨울올림픽에서부터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이 대회 노멀힐 남자 개인전에서 최서우가 결승 34위에 올라 역대 한국 스키점프가 기록한 올림픽 최고 기록을 세운 것이다. 같은 대회 단체전(최서우·김현기·최흥철·강칠구)에서 기록한 8위는 한국 설상 종목 사상 첫 올림픽 10위권 진입이었다. 스키점프 입문 10여 년 만에 이룬 이들의 ‘작은 기적’이었다.

최서우와 김현기는 이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영화 ‘국가대표’가 2009년 개봉하면서 큰 관심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한때뿐이었다. 영화 개봉 직후 물밀듯이 들어오던 스키점프 지망 원서도, 선수들에 대한 지원도 2, 3년 새에 금방 시들해졌다. 이와 함께 “이제는 좀 바뀌나”라는 기대감에 풍선처럼 마음이 부풀었던 둘은 다시 또 고개를 떨구고 앞날을 걱정해야만 했다. 오히려 상실감은 더 커졌다.

평창 겨울올림픽은 최서우 김현기에게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게 한 계기였다. 그동안에는 꿈꿔 보지 못한 안방에서의 올림픽을 놓칠 수 없었다. 또한 이번을 계기로 다시 한번 한국 스키점프가 발전할 수 있는 동력을 찾을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도 생겼다. 안방에서 멋진 비상을 보여주면, 스키점프의 바통을 이어받을 훌륭한 꿈나무도 생길 수 있다는 꿈을 꾸고 있는 최서우와 김현기다.

최서우는 이번 올림픽에 임하는 각오로 “한국의 1세대 스키점프 선수로서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앞으로 나아갔던 선수로 남고 싶다”고 밝혔다. 김현기는 “스키점프가 그 자체로 삶이 됐다. 이것 하나만 보고 산다”며 “이번 올림픽에서 정말 후회 없는 멋진 비상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최서우는 10일 노멀힐 본선 경기에 이어 16일 라지힐 남자 개인 예선에도 노멀힐에서 탈락한 김현기와 함께 나선다. 화려하진 않았지만 끈질겼던 그들의 비행이 종점을 향해 가고 있다.

평창=김재형 monami@donga.com·임보미 기자
#국가대표#평창올림픽#최서우#김현기#스키점프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