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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토론 즐기고 한밤 과거시험도… 조선의 밤은 낮보다 화려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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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토론 즐기고 한밤 과거시험도… 조선의 밤은 낮보다 화려했네

조종엽기자 입력 2018-02-07 03:00수정 2018-02-07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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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밤 풍속 들여다보니
혜원 신윤복(1758∼?)의 그림 ‘야금모행(夜禁冒行·야간 통행금지를 무릅쓰고 가다)’. 그림 속 왼쪽 남성이 통금 위반을 단속하는 순라군(巡邏軍)이다. 갓 쓴 양반은 ‘봐 달라’는 모양새고, 여성은 담배만 피워댄다. 간송미술관 제공

‘달이 차오른다, 가자’(장기하와 얼굴들). 한국인에게는 밤을 사랑하는 유전자(DNA)가 있는 것일까. 밤늦게까지 놀거나 일을 하는 이들을 일컫는 ‘호모 나이트쿠스(Homo Nightcus)’라는 말이 회자되고, 외국인은 한국의 밤 문화를 신기하게 본다.

전깃불이 없던 옛 시절의 밤은 어땠을까?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의 김유진 씨가 ‘서울민속학’에 게재 예정인 논문 등을 통해 ‘조선의 밤’을 살펴봤다.

1902년 고종의 즉위 40년을 축하하며 열린 야진연(夜進宴) 그림. 야진연은 왕이 친림(親臨)하는 큰 규모의 밤 연회로, 그림 속 연회는 해시(亥時·오후 9∼11시)에 열렸다. 한국고전종합DB


○ 궁중, 문묘의 숨 가쁜 밤

적막하기만 했을 듯한 조선의 밤은 사실 은근히 분주했다. 한밤중에 과거 시험이 열리기도 했다. 바로 알성시(謁聖試)다. 알성시는 임금이 성균관 문묘의 공자 신위에 참배하는 ‘알성례’ 뒤에 치러졌는데 알성례를 대개 밤에 했기에 시험 문제도 인시(寅時·오전 3∼5시)는 돼야 출제됐다. 과장(科場)에는 횃불을 밝혔고, 초에 눈금을 그어 놓고 촛불이 그 금까지 타면 시험을 종료하는 각촉(刻燭)시의 방식으로 치러지기도 했다. 활쏘기 실력 등을 보는 무과는 어둠 속에서 과녁을 구별하기가 어려우므로 시험 시간을 바꿔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오기도 했다.

궁에서는 밤에 왕이 신하와 공부하고 정치를 토론하는 한편 간단히 술잔을 기울이기도 하는 야대(夜對)를 했다. ‘심야 토론’을 즐긴 조선 최고의 ‘올빼미 왕’은 성종이다. 김 씨가 조선왕조실록의 야대 기록을 분석한 결과 성종이 470번으로 가장 많았고, 영조(113번)가 뒤를 이었다. 승정원일기에는 오전 1∼5시에 야대한 기록도 있다.

○ 조선의 3대 철야일


한양 도성 안은 대체로 초경 3점∼5경 3점(대략 오후 8시∼오전 4시) 야간통행이 금지(야금·夜禁)됐다. 하지만 달맞이를 하는 정월대보름 등의 명절에는 야금을 해제해 백성들이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아예 밤을 새우는 것이 목적인 ‘철야일’도 공식적으로 존재했다. 섣달그믐 밤인 제야일(除夜日)에는 집집마다 불을 켜두고 가족이 함께 둘러앉아 송구영신(送舊迎新)의 의미로 밤을 새웠다. 윤기(1741∼1826)의 ‘무명자집’에는 이날 ‘거리에 곱게 단장한 여인들과 화려한 복장의 사내들이 넘쳐나며, 밤새도록 놀며 담소 나누는 소리가 시끄럽다’고 했다. 궁과 관아에서는 불놀이를 하거나 잡귀를 몰아내는 의식인 나례(儺禮)를 행했다. 포를 3번 쏘아(연종방포·年終放砲) 나쁜 기운을 쫓아내기도 했다.

동지섣달의 경신일(庚申日)에도 궁에서는 경신연(庚申宴), 양반들은 경신회(庚申會)를 열어 술과 음식을 즐기며 밤을 새웠다. 이날 잠을 자면 몸에서 삼시충(三尸蟲)이 빠져나가서 하늘의 신에게 자신의 잘못을 고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음력 12월 24일에도 교년일(交年日)이라고 해 왕이 신하들과 밤을 새웠다.

○ 주등(酒燈) 걸고 호객하는 주막

‘거리에 행인 줄고 점포도 닫았는데(人稀街路市垂簾)/안개는 짙게 끼어 여염에 자욱하네(煙霧深籠撲地閻)/멀리서도 술집만은 분별할 수 있으니(惟有酒家遙可辨)…’

18세기 후반 도성의 저녁 풍경을 소재로 한 윤기의 시다. 주막은 등이나 깃발을 내걸고 어둠 속에서 손님을 모았다. 조선 후기에는 몰락한 양반 여성이 주인이고 술과 음식은 하인이 나르는 ‘내외(內外) 술집’이 생겨났다. 근대에 들어서면 선술집과 야시장이 등장했다. 대한제국 시기 고종은 밤에 야회연(夜會宴)과 야진연(夜進宴)을 열었다.

김 씨는 “전통시대에도 야금이 해제되면 백성들은 다양한 밤 풍속을 향유했다”며 “일상적으로 밤 시간을 누릴 수 없었기에 그 의미가 더욱 각별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알성시#성균관 문묘#알성례#야대#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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