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은철의 스토리와 치유]<24>울기 좋은 곳은 어디인가?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2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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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는 늘 뭔가를 남에게서 빌린다. 그냥 빌리기도 하고, 때로는 빌려서 전복하기도 한다. 시인 천양희의 ‘나의 처소’에 나오는 ‘호곡장(好哭場)’이라는 표현은 좋은 예이다.

‘울기 좋은 곳’이라는 의미의 ‘호곡장’은 연암 박지원의 표현이다. 어감과 달리, 광활한 요동 벌판에 압도당한 느낌을 표현한 말이니 흔히 말하는 울음과는 거리가 멀다. 연암은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벌판을 보고 울음이 터질 것만 같은 벅찬 감정을, 아기가 세상에 막 태어나서 터뜨리는 울음에 비유했다. 그에게는 갓난아이가 우는 것이 어머니의 답답한 배 속에서 탁 트인 세상 밖으로 나온 것에 대한 환희의 울음으로 비쳤던 모양이다. 아이가 우는 이유가 정말 그러한지는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추사 김정희가 ‘요야(遼野)’라는 시를 썼을 정도로 연암의 비유가 절묘했다는 것이다. 그렇다. 연암의 말처럼, 눈물이나 울음은 슬픔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런데 ‘나의 처소’는 연암의 표현을 빌리되, 단박에 그것의 방향을 슬픔 쪽으로 돌려놓는다. 말들을 키우는 들이라는 의미의 ‘마들’. 말들이 사라졌어도 여전히 지루하게 누워 있는 마들. 그래서인지 어쩌다 눈에 보이는 한 그루의 나지막한 나무마저도 ‘평생 누워 있던 들이 지루함을 견디다 못해/벌떡 일어선 게 아닐까’ 싶다. ‘나’는 그런 곳에서 울 수 있을까. 아니다. ‘내’가 울 수 있는 곳은 ‘호곡장(好哭場)인 나의 처소’다. 여기에서 시인은 연암의 ‘열하일기’에 나오는 ‘호곡장’에 밴 환희의 감정을 툭 털어낸다.

시인은 이 시에서만 호곡장의 의미를 돌려놓은 게 아니다. ‘직소포에 들다’라는 시에서도 마찬가지다. 얼핏 보면, 이 시는 변산반도에 있는 직소폭포의 아름다움을 읊은 시로 보인다. 폭포 소리에서 ‘명창의 판소리 완창’을 듣고 그곳을 피안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 거의 확실해 보인다. 그러나 시의 속내는 사뭇 다르다.

삼십대 초반의 시인에게 직소폭포는 절망의 울음을 토하기 좋은, 연암의 표현으로 ‘호곡장’이고 추사의 과장된 표현으로 ‘천추대곡장(千秋大哭場)’이었다. 그곳은 삶의 끈을 놓아버리기에도 좋은 곳이었다. 그러나 시인이 폭포와 함께 통곡한 후에 깨달은 것은 삶은, 아니 생명은, 아파도, 아니 아프기 때문에 더, 환대해야 하는 대상이라는 사실이었다. 매창과 촌은의 아린 사랑과 이별 이야기를 어딘가에 품고, 시인과 같이 울어주다가 시인에게 생명을 예찬하게 만든 직소(直沼)폭포의 ‘곧은’(直) 물줄기, 곧은 환대.
 
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교수
#시인 천양희#나의 처소#호곡장#울기 좋은 곳#연암 박지원#직소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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