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표의 근대를 걷는다]<81>표준전과를 삼켜버린 소금창고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2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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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중구 싸리재 고갯길에 있는 예술공간 ‘잇다스페이스’의 출입문.
인천 중구 싸리재 고갯길에 있는 예술공간 ‘잇다스페이스’의 출입문.
인천 개항장 거리에서 배다리 마을로 넘어가는 싸리재 고갯길. 그 한 모퉁이 낡은 벽돌 건물의 출입문에 이렇게 쓰여 있다. ‘동양서림’ ‘새전과·표준학력고사·중학전과·새산수완성’. 출입문의 널빤지 틈새는 벌어졌고 하얀색 페인트 글씨는 탁하게 바랬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오래된 창고 분위기다. 벽돌들은 여기저기 금이 갔고, 천장엔 먼지 낀 옛날식 애자가 붙어 있다. 한쪽 벽엔 누런 태극기가 걸려 있고 1980년대 신문지를 붙였던 흔적도 보인다. 이곳에 들어오는 미술작가들은 “아, 여기서 전시회를 열고 싶다”고 탄성을 지르기 일쑤다. 예술공간 ‘잇다스페이스’의 풍경이다.

배다리 마을은 인천지역 근대의 길목이었다. 130여 년 전 제물포항으로 들어온 근대 문물은 배다리를 거쳐 인천지역으로 확산되었다. 당시 개항장 일대에서 일본인, 중국인에게 밀려난 한국인들이 이곳에 모여 살았고 성냥공장 양조장 미곡상회 등이 생겨났다. 1950, 60년대엔 헌책방들이 가세하면서 헌책방 골목으로 명성을 날리기도 했다.

잇다스페이스 건물은 원래 1920년대 소금창고로 지어진 건물이다. 소래 염전에서 생산한 소금이 수인선 협궤열차를 타고 인천에 들어오면 그중 일부를 여기에 보관했을 것이다. 소금창고 건물은 1940년대 여성 사우나로 변신했다. 1950년대 문조사라는 서점으로 바뀐 뒤 헌책방 동양서림으로 이어졌다. 동양서림의 주요 품목은 초중고 참고서였다. 1970, 80년대는 표준전과, 동아전과를 비롯해 성문기본·종합영어, 수학의정석 등이 득세하던 시절이었다.

헌책의 수요가 줄면서 1992년 동양서림은 문을 닫았다. 그 후 건물은 빈 채로 방치되었고, 언제부턴가 동네 쓰레기 창고로 바뀌어 버렸다. 그러던 중 2015년 눈 밝은 목공예 작가 부부가 이 건물을 찾아내 문화예술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이들은 건물에 남아있는 시간의 흔적을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되살렸다.

내부 벽에 붙어 있는 오동나무 줄기도 인상적이다. 그 줄기를 따라가면 놀랍게도 건물 밖 오동나무로 이어진다. 시멘트 바닥 밑으로 뻗어 들어온 오동나무 뿌리가 내부 틈새로 빠져나와 벽을 타고 올라간 것이다. 그 생명력이 마치 이 건물의 운명을 말해주는 듯하다. 소금창고에서 사우나, 헌책방으로 이어진 100년의 흔적. 이곳에서 언젠가 표준전과의 추억을 담아 특별한 전시를 열었으면 좋겠다.
 
이광표 논설위원·문화유산학 박사
#배다리 마을#인천 중구 싸리재 고갯길#예술공간 잇다스페이스#동양서림#헌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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