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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조 “北, 선전 위해 평창행… 올림픽 유치때부터 계획했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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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조 “北, 선전 위해 평창행… 올림픽 유치때부터 계획했을 것”

길진균 논설위원 입력 2018-01-20 03:00수정 2018-01-20 0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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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기획]김신조 목사가 말하는 ‘1·21사태, 그후 50년’
김신조 목사는 18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50년이 지났지만 북한은 변하지 않았다. 북한은 망할 때까지 절대 대남전략을 바꾸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1·21사태가 일어난 지 50년이 지났다. 북한 특수부대원 31명이 박정희 대통령 살해를 목적으로 청와대 근방까지 침투했던 1968년 그해는 푸에블로호 나포사건 등 한반도 전쟁 기운이 최고조에 이른 시기였다. 김신조 목사를 만나 그가 겪은 남과 북에 대해 들어봤다.》
 

1968년 1월 22일 오전 1시경. 영하 10도에 칼바람까지 몰아쳤다. 세검정계곡(서울 종로구)은 조명탄과 플래시 불빛, 확성기 소리로 가득 찼다. “나와라. 살려준다. 투항하라.” 계곡의 바위 뒤 곳곳에 자리 잡은 육군 30사단 92연대 소속 장병들이 총을 겨누고 있었다.

무기는 수류탄 하나뿐이었다. 북한에서 가져온 총과 350발의 실탄, 13개의 수류탄은 도주 과정에서 인왕산 바위 밑에 숨겼다.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 됐다. 죽을 것인가, 살 것인가. 수류탄 안전핀에 손가락을 걸었다. 수년 동안 훈련받은 대로 자폭해야 할 시간이었다. 확성기 소리가 다시 귀를 파고들었다. “반드시 살려준다. 믿고 나와라.”

두 손을 들고 플래시 불빛을 향해 걸어 나갔다.

김신조 목사는 탈북자 또는 귀순용사가 아니다. 1968년 1·21사태 당시 투항한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124군 부대 6기지 2조 조장(소위)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 지시를 받고 남파된 특수부대 장교였다. 당성과 실력을 인정받은 엘리트 군인이었다. 투항 직후 기자회견에서 “왜 내려왔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라고 말할 정도로 기세가 등등했었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났다. 한국과 북한 모두 많은 변화가 있었다. 남한 대통령을 직접 살해하려는 원시적인 도발이 핵개발이라는 치명적 도발로 바뀌었을 뿐 남북 간의 대치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1·21사태 50년을 사흘 앞둔 18일 서울 구로구 성락교회에서 김 목사를 만났다. 그는 “26세 젊은 총각 군인으로 한국에 왔는데 벌써 50년이 지났다. 이제 76세가 됐고 손주들을 포함해 11명의 대가족을 이뤘다. 나도 내 인생을 한번 정리할 시점이 된 것 같다”며 말문을 열었다.

○ “한국, 북한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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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사태 당시 북한군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김 목사는 자리에 앉자마자 걱정부터 했다.

―50년 전과 지금의 남북 관계를 비교한다면….

“북한의 속성은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북한은 변하지 않았는데 북한을 바라보는 한국 사람들의 생각만 너무 많이 바뀌었다.”

―우리 국민의 안보 의식이 달라졌다고 생각하나.

“180도 바뀌었다. 사고방식이 완전히 달라졌다. 당시에는 6·25를 직접 겪었던 사람들이 많았고, 늘 북한의 위협과 도발 속에 살았다. 그런 고난 속에서 나라를 지켰고 한국이 여기까지 왔다. 요즘 사람들은 그걸 모른다. 북한 정권에 대해 적개심이 없다. 오히려 북한에 동조하는 사람들만 늘고 있다.”

―50년이 흘렀다. 북한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북한은 바뀐 게 하나도 없다. 이제 시대가 바뀌어서 예전처럼 적화통일이라는 말을 쓰지 않을 뿐이다. 요즘은 ‘한민족’이라고 강조한다. ‘한민족’에 대해 대한민국에 반대할 사람 얼마나 있겠느냐. 하지만 그게 잘못된 생각이다. 김일성에 이어 김정일, 그리고 김정은으로 바뀌었지만 북한은 한 정권이다.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 북한은 망할 때까지 절대 대남전략을 바꾸지 않는다.”

그가 남파됐던 1968년은 1년 내내 한반도에서 전쟁의 기운이 감돌던 시기였다. 남한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북한이 김신조 등 특수부대원 31명을 보낸 1·21사태를 시작으로 이틀 뒤인 1월 23일엔 미국 해군 소속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원산 앞바다에서 북한에 나포됐다. 승무원 83명을 태운 채였다. 미국은 동해에 항모와 함정 30여 척을 배치했다. 11월에는 경북 울진과 강원도 삼척에 북한 특수부대원 120명이 침투했다. 강원 평창군 진부면 도사리의 집에서 가족과 함께 살해당한 9세 소년 이승복도 희생자 중 한 명이었다. 서울 광화문에 충무공 이순신 동상이 세워진 것도 1968년이었다. 왜구를 물리친 충무공이 북한을 막는 국가의 수호신으로 등장한 시기였다.

―남북 관계가 긴박하다. 한반도 비핵화 가능할까.

“비핵화? 안 된다.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뭐라고 했나. 북한은 인민들이 풀을 먹어도 핵 포기 안 한다고 했다. 김정은과 북한 지도부는 체제가 무너지면 자신들의 과거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죽는 것이다. 김정은에게 핵은 생존이다. 북한 지도부 마지막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절대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1994년 1차 북핵위기 때 (북핵시설 폭격 계획대로) 했으면 북한이 저렇게까지 가지 못했다. 이젠 붕괴가 안 된다. 북한은 이제 가질 것을 다 가졌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다고 보나.

“2003년도 6자 회담 때부터 잘못됐다. 나는 분명히 반대했다. 난 탈북자가 아니다. 북한의 군사 전략과 전술을 훈련하고 분석한 사람이다. 6자 회담 자체가 핵 개발에 필요한 시간과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라고 봤다. 필요할 때마다 빠졌다 들어갔다 하는 것이 공산주의 전략이다. 지금도 똑 같다.”

―평창 겨울올림픽에 북한이 선수단과 예술단 등 대규모 대표단을 보낸다.

“북 체제를 선전하기 위해 오는 것이다. 북 체제는 선전·선동으로 유지된다. 국가적으로 선전·선동에 엄청 투자한다. 평창에 오는 것은 오래전부터 세워진 계획이라고 본다. 한국이 이명박 정부 때 겨울올림픽을 유치했을 때부터 계산한 거라고 본다. 먼저 핵 개발하고 겨울올림픽을 통해 북한의 체제와 북한이 살아있다는 것을 전 세계에 선전하려는 계획이 서 있었을 것이다.”

―평화 올림픽이다. 북한도 손님인데 어떻게 대해야 하나.

“손님으로만 대해주면 된다. 박수 치고 환호하게 되면 북한은 대한민국을 자신들이 장악했다고 선전할 것이다. 김정은 체제 유지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한국은 북한의 전술을 너무나 모르는 것 같다.”

―현 정부 대북 정책은 어떻게 생각하나.

“북한 문제는 많이 연구하고 분석한 전문가들 얘기를 듣고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어느 정부든 내 정권에서 이걸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머리에서 빼야 한다. 다음 대로 넘긴다고 생각하고 접근해야 한다. 서두르면 실수를 하게 된다. 북한은 절대 선의를 선의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원리 원칙대로 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도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 “나는 체포된 공비가 아니다. 국방부 바로잡아 주길”

개인적인 얘기로 넘어갔다. 동료와 가족들 얘기를 하는 대목에선 눈가가 붉어졌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하나.

“철길을 깔아야 기차가 달릴 수 있다. 관광지도 자원도 없는 한국이 북한의 도발 등 그 어려움 속에서 여기까지 왔다. 그 철길을 만든 것이다. 잘한 건 잘한 것이다.

―한국에 왔을 때 한국군은 어떤 상태였나.

“1968년만 해도 북한의 국내총생산(GDP)이 한국보다 많았고, 군 훈련 운영 시스템 등도 앞서 있을 때다. 휴전선 방어도 북쪽과 달리 남쪽은 허술했다. 나는 1·21사태 이전에 두 번이나 휴전선을 통해 한국에 내려와 정찰작전을 수행하고 돌아갔다. 당시 한국군에는 ‘유격’이라는 단어도 없었다. 방첩대에서 조사받으면서 내가 북한에서 받았던 훈련과 전술을 알려줬다. 예비군도 그 때문에 창설된 것이다.”

1·21사태는 지금과 같은 한국의 방위 체제가 새로 만들어지는 계기가 됐다.

그해 2월 육군 병사의 복무 기간이 2년 6개월에서 3년으로 늘어났다. 같은 해 4월 1일엔 예비군이 창설됐다. 모든 성인에게 12자리(지금은 13자리)의 숫자가 부여되는 주민등록증이 처음 발급된 것은 11월이었다. 2년 넘게 효자동 방첩대에서 조사받으며 지내오던 김 목사는 군에 많은 정보를 제공한 공로를 인정받아 1970년 4월 10일 풀려났다. 자유인이 된 것이다.

―방첩대에서 풀려난 이후 사회 생활할 때 어려움은 없었나.

“정부에서 한국화약에 일자리를 만들어줬다. 2, 3개월 다니다 인천에 있는 화약공장 견학을 다녀와서 바로 그만뒀다. 만약 공장이 무슨 사고로 폭파되기라도 하면 바로 내가 뒤집어쓸 것 같았다. 폭파범 누명을 씌워 희생양을 만들까 봐 걱정됐다. 그런 시절이었다. 그런데 3년 후 이리역 폭파사고가 있었다. 도시가 잿더미가 됐다. 그게 그 회사 관련 사고였다. 계속 다녔으면 난 이미 (폭파범으로 몰려) 죽었을 것이다.”

―사회에 나왔을 때 사람들 시선은 어땠나.

“난 지금도 지하철을 잘 안 탄다. 얼굴 알아보고 대뜸 ‘너 김신조지? ×××’라고 욕하는 사람들이 있다. ‘너 때문에 군대 6개월 더 복무했다. 엄청 고생했다’며 화를 낸다. 처음 회사 다니기 시작할 때부터 그런 욕 정말 많이 먹었다. 당시에 언론에 너무 많이 보도가 돼서 어른들 중에는 지금도 얼굴 알아보는 사람이 많다.”

―생계는 어떻게 유지했나.

“이후 건설회사에 다시 취직이 됐다. 그리고 결혼을 했고, 아내 덕분에 신앙을 갖게 됐다. 1996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안보강연과 신앙생활하면서 살고 있다. 이제는 아들딸과 손주 등 10명이 넘는 가족을 이뤘다.”

이 대목에서 그는 잠깐 말을 멈췄다. 다시 입을 여는 데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한국에서 행복을 얻었는데… 경기 파주 문산 쪽에 가면 적군묘지라고 있다. 1·21사태 때 숨진 동료, 친구들이 묻혀있다. 북한이 이제 그들의 유골을 가져가야 한다. 그리고 가족 생각이 난다.”

―북한의 가족은 어떻게 됐나.

1968년 1월 22일 새벽 국군에 투항한 북한 특수부대 김신조 소위가 장병들에게 호송되고 있다. 그는 기자들 앞에서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라고 말했다. 동아일보DB
“처음에 내가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다’고 했을 때는 북한에서 나를 영웅 대접했다고 하더라. 그러나 내가 안보강연 다니고 하니까 1980년쯤에 부모님을 고향인 함경북도 청진 시내 운동장에 세워놓고 1만 명이 보는 앞에서 공개처형 했다고 한다. 흔히 말하는 인민재판을 한 거지. 그 얘기도 몇 년 후에 청진에서 온 탈북자에게서 들었다. 7남매였는데 6명의 형제는 아예 행방을 알 수 없다. 여러 루트를 통해 수소문해 봤는데 북한에서 아예 주민등록이 말소됐다고 한다. 우리 가족의 기록 자체가 없어진 거지….”

―언젠가 고향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

“가보고 싶다. 그런데 통일이라는 것은 누구도 모른다. 그건 미래고. 빨리 했으면 좋겠지만 우리는 노력할 뿐이다. 아들딸과 손주들에게 고향집 약도를 그려줬다. 혹시 내가 쓰러지고 나서 통일이 되더라도 꼭 고향에 가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얘기는 없나.

“50년 전 나는 분명히 투항했다. 그런데 국방부 기록은 아직도 ‘체포’로 돼있다. 당시 군인들이 자신들의 공을 내세우기 위해 그렇게 기록했을 것이다. 내 아이들은 어릴 때 내가 ‘체포된 무장공비’라는 교과서를 읽고 자랐다. 난 체포된 게 아니다. 국방부가 이제라도 바로잡아 줬으면 한다.”

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


#김신조#1·21사태#평창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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