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속에서 더 빛나는 삶… 그가 떠난 자리, 글이 남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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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정미경 작가 1주기 맞아 장편소설-소설집 나란히 출간
남편 김병종 “미완, 그 자체로 의미”
“터무니없는 죽음도 곧 일상이 돼” 남은 이들에게 건넨 마지막 읊조림

“터무니없는 죽음도 악다구니 같은 억센 슬픔의 순간이 지나가면 곧 일상이 돼.”

정미경 소설가(1960∼2017)의 유고 소설 ‘당신의 아주 먼 섬’(문학동네)에서 중년의 정모는 이렇게 말한다. 지난해 1월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작가가 남은 이들에게 건네는 말 같다.

고인의 1주기(18일)를 맞아 장편소설 ‘당신의…’와 소설집 ‘새벽까지 희미하게’(창비)가 나란히 출간됐다.

‘당신의…’는 습작 원고 더미에 묻혀 있다 고인의 작업실을 정리하던 남편 김병종 서울대 동양화과 교수(65)가 발견해 펴낸 것. 섬들이 포도알처럼 흩어져 있는 풍경이 펼쳐진 한 섬에서 상처 입은 이들이 치유되는 과정을 생동감 있게 그렸다. 오토바이 사고로 친구를 잃은 고교생 이우는 어머니 연수의 고향인 섬에서 연수의 친구 정모와 지낸다. 둘은 바다를 보며 느릿느릿 걷고, 버려진 소금창고를 도서관으로 만들며 차츰 힘을 얻는다.

간암 진단을 받은 지 한 달 만에 눈을 감은 고인은 이 작품을 쓸 때 몸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삶과 죽음을 응시한 문장에 오랫동안 눈길이 머문다.

“죽는다는 건 영혼이 우주 저 멀리로 날아가는 게 아니라 데칼코마니처럼 여전히 곁에 있는 것 같아”라고 읊조리는 이우의 말이 그렇다. ‘어떤 하루는, 떠올리면 언제라도 눈물이 날 것이라는 걸 미리 알게 한다’는 문장은 빛나는 순간을 돌아보는 고인의 모습을 그려 보게 만든다.

고 정미경 소설가(왼쪽)와 김병종 서울대 동양화과 교수 부부. 김병종 교수 제공
고 정미경 소설가(왼쪽)와 김병종 서울대 동양화과 교수 부부. 김병종 교수 제공
김 교수는 발문을 통해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토해냈다. 그는 15일 전화 인터뷰에서 ‘당신의…’ 원고를 발견하고도 출간을 망설였다고 했다.

“정 작가는 문장을 숱하게 고쳐 쓴 뒤에야 출판사에 원고를 넘기는 완벽주의자예요. 글을 출력해 책 더미에 뒀다는 건 수정하려 했다는 걸 의미해요. 갑작스레 떠나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지만요….”

고민 끝에 책을 내기로 한 건 인생 자체가 미완이기에 예술 역시 미완인 채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란다.

“정 작가는 펄쩍 뛰며 고치려고 했겠지만 색다른 시도라고 여기고 출간했어요. 아마 곁에 있었다면 곱게 눈을 흘긴 채 따라 줬을 거라 생각해 봅니다.”

‘새벽까지…’는 ‘못’, ‘목 놓아 우네’, ‘장마’ 등 2012년부터 2016년까지 문예지에 발표한 단편 5개를 묶었다. 더 많이 소유하려다 좌절한 남성과 처음부터 욕망을 내려놓은 여성(‘못’), 잘못 보낸 문자메시지로 이어져 깊은 고민까지 털어놓는 남녀(‘목 놓아 우네’) 등 아등바등 살아가고, 때로 속물스럽기도 한 이들을 통해 인간과 삶의 복잡다단한 이면을 정교하게 짜내려갔다. 추모 산문과 해설에서 문인들은 ‘이데올로기를 현실의 삶으로 끌어들여 생생한 피와 살을 부여할 줄 아는 작가’(정지아 소설가), ‘삶의 세부를 치밀하고 견고하게 새겨 넣는 작가’(백지연 문학평론가)로 고인을 기억했다.

김 교수는 18일 서울 서초구의 작은 교회에서 가족들과 조용히 추모 예배를 올릴 예정이다. 당초 문학, 미술을 결합한 전시회를 열 계획이었지만 작업을 할수록 사무치는 그리움에 너무 힘겨워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당신의…’에서 정모는 염전의 소금 꽃을 가리키며 말한다. “징허게 모인 기운이 터져 나오면 그게 꽃이다.”

고인은 온 힘을 다해 글을 자아냈다. 그의 작품들은 그렇게 터져 나왔다.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처럼.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정미경#당신의 아주 먼 섬#새벽까지 희미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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