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째 배달된 사랑의 쌀 300포대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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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월곡2동의 특별한 신년회

매서운 한파가 찾아온 11일. 오전 6시 반이 넘었을까. 여전히 어둑어둑한데 서울 성북구 월곡2동주민센터는 주민과 직원 등 50여 명으로 북적였다. 주민센터에서는 따뜻한 차를 끓여 내왔다. 이들은 차를 마시며 쌀 20kg들이 300포대를 기다렸다. 어린이들이 산타할아버지를 기다리는 듯했다. 지난 7년간 이 주민센터에 쌀을 보내준 익명의 ‘쌀 천사’는 어김없이 지난해 12월 27일 전화 한 통만 걸었다. “내년 1월 11일, 쌀 배달 가니까 받아주세요.”

오전 7시 5분경, 3시간 반 전에 경북 봉화정미소를 출발한 쌀을 실은 트럭이 도착했다. 주민들은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한 포대씩 어깨에 짊어졌다.

기부자가 누구인지는 모른다. 이날 쌀을 함께 나른 김영배 성북구청장은 “어떤 분인지 구청 직원들이 물어볼 때마다 ‘물어보지 말아 달라’고 간청해 이름이나 직업을 더 이상 추적하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다만 기부자는 간접적으로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 있는 것뿐이니 내 이름을 알릴 필요가 없다”고 했다. 구청이 들은 바로는 기부자의 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월곡2동에 살았다고 한다. 언제 떠났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하는 일이 번창하고 재산이 불어난 뒤에도 월곡2동을 잊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 역시 모른다. 기부자의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재물이 생기거나 일이 잘 풀리면 꼭 월곡2동 주민들을 도와 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뜻을 아들이 이어가는 셈이다. 이번까지 8년 동안 기부한 쌀은 2400포대. 돈으로 따지면 약 1억2000만 원어치다.

이 쌀은 도움이 필요한 주민들에게 돌아간다. 2만 명 조금 넘는 사람이 사는 월곡2동은 과거 강북에서도 달동네였다. 지금은 아파트가 많이 들어서면서 달라졌지만 어려운 주민은 아직도 곳곳에 있다. 이날도 해당 주민들은 순서를 기다려 쌀을 가져갔다. 거동이 어려운 사람에게는 주민센터에서 날라다 줬다. 이날 쌀을 받은 한 기초생활수급자는 “천사 덕분에 매년 겨울을 든든하게 보낼 수 있어 참 고맙다”고 말했다.

쌀 천사의 선행은 주민들에게 나눔의 씨앗을 퍼뜨렸다.

하광용 월곡2동 통장은 “얼굴 없는 천사에게 질 수 없다”며 쌀 10kg들이 100포대와 라면 50박스를 이날 주민센터에 내놨다. 상월곡실버센터 어르신 100명은 1인당 1만 원씩 모은 100만 원을 기부했다. 인근 동아에코빌아파트 주민들도 공방모임에서 폐가구를 활용해 직접 만든 미니식탁 11개와 나무도마 11개를 준비했다.

이날 주민센터에 모인 사람들은 쌀을 모두 나른 후 신년하례회를 겸해 시루떡을 나눠 먹었다. 김 구청장은 “소외된 사람들은 주변에 따뜻한 이웃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누군가가 나를 지지해 주고 있다는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도움을 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돕는 선행의 선순환이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노지현 기자 isityou@donga.com
#사랑의 쌀#월곡2동#얼굴없는 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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