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버의 한국 블로그]영국 여권을 든 런던의 이방인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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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폴 카버 영국 출신 서울시 글로벌센터팀장
폴 카버 영국 출신 서울시 글로벌센터팀장
지난 크리스마스 때 나의 모국(母國)인 영국에 다녀왔다. 18개월 만이다. 3년 만에 영국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이전 직장에서는 해외 출장 등으로 영국에 다녀올 기회가 많았다. 그러나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뒤 해외 출장이 거의 없었고, 휴가도 적어 모국에 다녀올 기회가 좀처럼 없었다. 직장 동료들은 내게 “좋겠다”며 부러워했고, 직장 상사는 “혹시 돌아오지 않는 것은 아니지?”라며 농담을 건넸다. 간만에 영국에 가는 나도 기대가 컸다. 그런데 막상 영국에 도착해 보니 내가 ‘나무에서 떨어진 원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당히 낯설었다. 내가 과연 모국에 돌아온 것인지 아니면 단골 휴양지로 여행을 온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일까.

나는 2007년부터 한국에서 살았다. 그동안 나는 많이 변했다. ‘한국화’라고 말하기엔 좀 그렇지만 한국에 적응하면서 오히려 영국과는 거리가 생겼다. 런던 공항에 내리자 이런 느낌이 확연했다. 지하철을 타려고 매표소에 갔는데, 창구 직원은 내가 건넨 돈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어리둥절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영국에서는 6개월 전에 화폐 디자인이 바뀌었단다. 18개월 전에 방문했을 때 쓰다 남은 돈은 더 이상 유통되지 않았다.


영국인들의 모습을 보고는 더 강하게 내가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패션감각은 일반적인 영국인들과는 이미 많이 달랐다. 한국에서는 내 체격에 맞는 옷을 사는 게 쉽지 않아서 영국에 체류하는 동안 옷을 여러 벌 구입하려고 했다. 그러나 옷가게, 쇼핑몰에선 마음에 드는 옷을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영국인들이 어떻게 저렇게 끔찍한 디자인의 옷을 입을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가지게 됐다.

저녁에 가족들과 함께 텔레비전을 볼 때도 아는 방송 프로그램이 거의 없었다. 영국 배우, 가수 등을 잘 알지 못했다. 또 방송 내용을 잘 모르니 가족들과의 대화에 쉽게 끼지 못했다. 며칠 뒤 친구들을 만났을 때도 역시 대화를 이어가는 게 쉽지 않았다. 유행어, 속어 등 모르는 게 대부분이었다. 영국의 주요한 시사 이슈도 잘 모르는 내용이 많았다.

입맛도 살짝 달라진 것 같다. 지인들은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나는 한식을 매우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한국에서 만든 양식에도 불만이 적지 않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어느 정도 이런 한식, 한국 스타일의 양식 등에 적응이 됐나 보다. 과거 영국에서 살았을 때 내가 좋아했던 음식을 먹어봤는데, 너무 달았다. 맛이 없었다.

물론 좋은 점도 많았다. 지난해 6월부터 영국에서 유학하는 아들을 6개월 만에 만났다. 기뻤다. 아들은 영국 생활에 잘 적응했다. 안심이 됐다. 다른 가족들을 만나서 매우 반가웠다. 또 늘 붐비는 복잡한 서울의 칙칙한 겨울에서 벗어나 영국의 파릇파릇하고 완만한 언덕도 볼 수 있었다. 큰 힐링이 됐다. 마지막으로 어머니가 해주는 집밥은 여전히 맛이 있었다.

한국에 돌아와서 친구와 이런 상황에 대한 내 생각을 털어놓았다. 그는 귀화를 권유했다. 나는 대한민국에 귀화할 수 있는 자격을 어느 정도는 갖췄다. 하지만 나 자신은 아직 심적으로 준비를 하지 못했고 그래서 지금까지 신청하지 않았다. 아마 나는 ‘크리켓 테스트’에서 100% 탈락할 것이다. 크리켓 테스트는 사람들의 정체성을 가늠하는 잣대 중 하나다. 어느 영국 정치인이 이민자 사회의 통합을 거론하며 ‘크리켓 테스트’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해 알려지게 됐다. 서인도제도, 남아시아에서 영국으로 이민 온 사람들이 출신국과 영국의 크리켓 경기에서 어느 팀을 응원하는지 살펴보면 이민 사회가 얼마나 잘 통합됐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올림픽, 월드컵 경기에서 한국 국가대표팀의 선전을 응원하지만 한국과 영국이 겨루면 내겐 영국이 우선이다.

내가 귀화를 하고 대한민국 국적을 가져도 한국에서는 내가 여전히 외국인으로 보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주민등록증을 들고 다니는 귀화인은 ‘외국인 금지’라는 푯말을 내건 일부 장소에서 여전히 출입이 제한될 것이다. 외국인으로 호의적인 대우를 받기도 하고 때로는 차별을 받기도 한다. 한국어를 매우 잘 구사하고 한국 사회에 융화하려고 노력하며 한국 문화를 더 잘 이해해도 나는 이 땅에서 평생 외국인으로 살지 않을까. 나는 한 손에 영국 여권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한국 영주권을 갖고 있다. 하지만 국민적 정체성에 대해서는 아직도 마음에서 혼란만 커지고 있다.

폴 카버 영국 출신 서울시 글로벌센터팀장
#영국#한국화#한국 스타일#크리켓 테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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