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실극장 폐관… 미래없는 ‘미래유산’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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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연극 1번지, 42년만에 문닫아

7일 폐관한 세실극장에서 관객들이 마지막 공연을 보고 나오고 있다. 김예윤 기자 yeah@donga.com
7일 폐관한 세실극장에서 관객들이 마지막 공연을 보고 나오고 있다. 김예윤 기자 yeah@donga.com
7일 오후 3시 서울 중구 세실극장의 ‘안네 프랑크’ 공연. 객석 320석 가운데 80석 정도 차던 평소와 달리 200명 넘는 관객이 왔다. 연극의 마지막 공연이자 세실극장의 마지막 공연이란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었다. 오후 4시 20분경 연극이 막을 내리고 무대 조명이 꺼지자 관객들은 자리를 떴다. 하지만 쉽게 극장 밖으로 발을 떼지는 못했다. 일부 관객은 흰 바탕에 검정 글씨로 ‘세실극장’이라고 쓴 간판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김혜련 씨(70·여)는 “결혼하기 전 여기서 종종 데이트한 추억이 있는데 문을 닫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무대 뒤에서는 배우와 스태프가 케이크에 꽂은 촛불을 불어 끄며 기념사진을 남겼다.

이렇게 세실극장은 문을 닫았다. 1976년 개관한 지 42년 만, 2013년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지 5년 만이다.

세실극장은 개관 이듬해부터 연극협회가 연극인회관으로 사용하며 대한민국연극제를 1회부터 5회까지 개최했다. 한국 연극사의 생생한 무대이자 상징성을 지닌 세실극장은 ‘당연히’ 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서울시는 2012년부터 문화재로 등록되지 않은 서울 근현대 유산 중 미래에 남길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것을 미래유산으로 지정했다.

하지만 재정난을 이기지 못했다. 서울연극협회도 나서 세실극장과 함께 건물주 대한성공회 측과 임대료 협상을 벌였지만 합의를 보지 못했다. 지난해 12월 31일 성공회 측과 맺은 임대 계약은 종료됐다. 다만 ‘안네 프랑크’ 종연(終演)인 이날까지는 문을 열 수 있었다.

극장 측과 서울연극협회는 연극계 현실에 탄식하면서도 서울시에 아쉬운 감정을 보였다. 협상 과정에서 미래유산이라는 점은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한다. 김민섭 세실극장 극장장은 “서울시로부터 협상을 중재하거나 재정 지원을 해주겠다는 말은 없었다”고 말했다. 김 극장장과 서울연극협회 관계자는 “미래유산으로 지정됐지만 시가 특별히 홍보를 해준 적도 없다. 이런 공간의 공공성을 지켜주는 데 시가 실질적인 도움을 주면 좋겠다”고 입을 모았다.

미래유산으로 지정된 건물이나 가게가 폐점 위기에 놓이거나 문을 닫은 것은 세실극장이 처음은 아니다. 45년 역사를 인정받아 2013년 미래유산으로 선정된 서울 서대문구 ‘공씨 책방’도 이달 말 가게를 비운다. 역시 임대료 문제로 소송까지 갔지만 허사였다. 책방 주인 최성장 씨(71·여)는 “건물주와 법정 다툼을 할 때 미래유산이라는 점이 고려되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사 갈 곳을 찾지 못해 우선 근처 지하창고로 옮긴다”고 말했다.

‘미래유산으로 지정만 해놓고는 끝’이라는 지적이 나오자 시는 2014년 11월 위기에 처한 미래유산을 민간단체가 매입하면 매입비의 최대 50%를 지원해준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 역시 무산됐다. 서울시 관계자는 “정책 검토는 했지만 민간단체가 (미래유산을 매입할 만한) 여유가 없고 예산 문제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미래유산 선정 취지가 민간의 자발적 보존 의지를 높이자는 것이다. 도움을 주기 어렵다. 앞으로 미래유산 홍보같이 도울 방안을 찾겠다”고 말했다.

시는 지난해 12월 서울대공원 청룡열차와 만화 ‘꺼벙이’ 등 38개를 미래유산으로 선정했다. 현재 미래유산은 모두 451개다.

김예윤 기자 yeah@donga.com
#세실극장#폐관#미래유산#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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