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새 7만명… 기부천사가 사라졌어요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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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부금 신고자 4년째 줄어 71만명
‘사랑의 온도’ 4년새 가장 낮아… 고령화-취업난에 기부할 사람도 줄어

서울에 사는 주부 김모 씨(63)는 2008년부터 10년 동안 국내 환경단체, 어린이 복지시설, 국제 구호단체 등에 매달 5만 원씩 자동이체를 하다가 지난해 11월 기부를 중단했다. 갑자기 지원을 끊은 계기는 치료비 핑계로 모금한 뒤 사리사욕을 채우며 호화롭게 살아 온 ‘이영학 사건’이었다. 김 씨는 “내가 낸 기부금이 나쁜 곳에 쓰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자신이 기부금 집행 과정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종교단체에만 기부할 작정이다.


경기 부진에다 기부단체에 대한 불신이 겹치면서 한국 사회에 ‘기부 가뭄’ 현상이 이어지고 있다. 기부자 수가 1년 만에 7만 명 가까이 줄면서 2006년 관련 현황을 처음 집계한 이후 가장 큰 폭의 감소세를 보였다.


3일 국세통계연보의 기부금 신고 현황에 따르면 2016년 국내 기부금 신고자 수는 71만5260명이었다. 연말정산을 위해 기부금 신고를 한 사람이 1년 만에 6만8722명(―8.8%) 줄어든 것이다.

바른정당 이혜훈 의원 등에 따르면 관련 통계가 집계되기 시작한 2006년부터 기부자 수는 금융위기에도 증가세를 이어가다 2012년 88만여 명으로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후 4년째 내리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가 지난해에는 기부자 수 감소폭이 역대 최대에 이르렀다.

기부 감소 현상은 올해도 이어지고 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매년 11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모금 목표액 대비 실제 모금액을 온도로 표시해 ‘사랑의 온도탑’을 세운다. 3일 현재 사랑의 온도는 80.5도로 최근 4년 동안 가장 낮다. 꼭 1년 전의 84.8도보다 4도가량 낮아진 것이다.

문제는 이 같은 현상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란 점이다. 통계청이 2년마다 실시하는 기부 경험 관련 사회조사에서 “기부한 적이 있다”고 답한 비율은 2011년만 해도 36.4%였다. 이 비율은 2015년 30%선이 무너진 뒤 지난해 11월에는 26.7%까지 떨어졌다. 특히 지난해 조사에서는 응답자 10명 중 6명꼴로 향후 기부할 의향이 없다고 답해 기부 감소가 장기 추세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졌다.

국내 기부 열기가 사그라든 데는 일부 단체의 일탈이 큰 영향을 미쳤다. 지난해에는 이영학 사건 외에 단체 한 곳이 시민 후원금 128억 원을 유용한 ‘새희망씨앗 사건’도 발생했다. 통상 모금단체 횡령 사건이 한 번 터지면 이전 모금액을 회복하는 데 1년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고령화와 청년 실업이 심각한 우울한 경제 상황도 기부 감소에 영향을 줬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직장인이 퇴직하면 가장 먼저 중단하는 것이 사회단체 기부”라며 “고령화 현상으로 기존 기부자는 줄어드는데 청년들이 취업을 하지 못하면서 새로운 기부자를 찾지 못하는 것이 현재 국내 모금단체가 처한 현실”이라고 설명했다.

시민단체의 투명성을 높이고 기부자들의 거부감을 줄일 수 있는 새로운 모금 방식을 도입하는 것이 시급하다. 정무성 숭실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해외에는 모금단체를 감시하는 시민단체가 있을 정도”라며 “국내에서도 기부에 대한 신뢰도를 높여야 기부 급감추세를 되돌릴 수 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자매결연을 하고 정기적으로 후원하는 방식에 의존하는 기부문화를 개별 사안에 따라 기부를 받는 방식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세종=박재명 jmpark@donga.com·최혜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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