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은철의 스토리와 치유]<19>므시외, 치유의 씨앗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3일 03시 00분


코멘트
때로는 누군가가 건네는 한마디의 말이 치유의 씨앗일 수 있다. 그 씨앗이 어떻게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워 결국에는 상처를 치유하는지 보여주는 스토리가 있다.

주인이 손님을 맞고 있다. 주인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고 손님은 40대 중반의 중년 남자다. 손님은 전혀 기대하지 않고 있다가 노인이 자신을 환대하자 너무 당황한 나머지 어쩔 줄 몰라 한다. 주인이 말한다. “므시외(Monsieur), 앉아서 몸 좀 녹이세요. 우리는 곧 저녁 식사를 하게 될 거요. 당신이 식사를 하는 동안, 잠자리가 마련될 거요.” 그가 “부드럽고 엄숙하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로 므시외라고 할 때마다, 손님의 표정이 환해진다.” 프랑스어 ‘므시외’는 영어로는 ‘미스터’에, 우리말로는 ‘선생’에 해당하는 말이다. 그런데 손님은 지금까지 ‘므시외’라는 말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바다에서 갈증으로 죽어가는 남자에게 주는 한 잔의 물” 같은 말. 세상을 향한 증오와 복수의 감정만 있는 손님에게, 그 말은 한 톨의 씨앗이 된다.

주인과 손님은 식사를 마치고 각자의 방에서 잠을 자게 된다. 손님은 새벽 두 시쯤 잠에서 깬다. 그는 배낭 속에 있는 놋쇠 촛대를 꺼낸다. 그것으로 노인을 죽이고 은접시를 훔쳐 달아날 생각이다. 그런데 그는 노인의 잠든 얼굴을 보는 순간, 머뭇거린다. 그는 노인의 얼굴을 응시한다.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감동했으며 강렬한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의 마음에 뿌려진 씨앗이 이미 발아되기 시작한 것이다. 의도했던 것과 다르게, 그가 은접시만 훔쳐 달아난 이유다.

이 스토리에서 주인은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미리엘 주교이고, 손님은 스물다섯 살에 빵 한 덩어리를 훔친 죄로 감옥에 들어갔다가 19년 만에 나온 마흔네 살의 장 발장이다. 장 발장이 헌병들에게 잡혀 돌아오자, 주교는 자신이 은촛대까지 줬는데 은접시만 가져갔다고 말해 그는 풀려난다. 칸트라면 안 된다고 했을 눈부신 거짓말.

장 발장의 마음에 뿌려진 씨앗은 더욱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기 시작한다. 세상을 향한 원망과 증오가 사라진다. 그는 부자가 되어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병원과 학교와 양로원을 지어주고, 고아가 된 소녀 코제트에게는 아버지가 되어준다. 세상의 타자들을 환대하는 삶, 자신을 사냥개처럼 쫓아다니는 비정한 자베르 형사마저 감화시킬 만큼 이타적인 삶, 그것은 ‘므시외’라는 말에서 시작되었다. 그가 죽으면서 허공을 가리키며 떠올린 것은 자신의 마음에 그 씨앗을 심은 사람이었다.

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교수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