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마지막 감사원장의 얼굴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2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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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원 독립에 도전 직면”… 정치권 지적한 황찬현 퇴임사
靑 간섭에 손들고 무책임한 소리
세월호 감사라도 잘했더라면 그 이후의 비극은 없었을지도
감사원 출신의 靑비서관 인사… 독립성과 중립성 흔들 우려

김순덕 논설주간
김순덕 논설주간
헤어질 때 영원히 사랑한다는 말을 남기는 사람이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헤어져도 좋다. 자신의 사랑은 변함없지만 단지 여건이 여의치 않아 이별을 고하는 척함으로써 영원히 괜찮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 무책임한 이기주의자이기 십상이다.

“향후 정치권 등에서 제기되는 소속 및 기능 재편 논의에 따라 감사원의 독립성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변화와 도전에 직면하게 될 수도 있다”는 퇴임사를 날리며 황찬현 감사원장이 1일 감사원을 떠날 때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 같은 신파를 떠올렸다.

가당찮은 비유라는 것, 안다. 그러나 감사원 독립성을 흔드는 외풍을 막기는커녕 잽싸게 누워버렸던 장본인이 4년 임기를 꽉 채운 날에야 마치 정치권 탓에 이 지경이 된 듯 경고음을 울린 것은 위선적이고 무책임하다. “이런 때일수록 감사원이 정치적 논란에 상관없이 헌법이 부여한 본연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 나가야 한다”는 대목에선 ‘떠날 때는 말없이!’로 되받아주고 싶을 정도다.

‘코드 감사’ ‘표적 감사’ 소리가 이 정권에서만 나온 것은 아니다. 이명박 정부 때도 KBS에 대한 감사로 정연주 사장을 물러나게 만든 전력이 있다. 그러나 KBS 사장을 갈겠다는 정부 의도에 따라 이사진의 법인카드 명세까지 샅샅이 뒤지는 식으로 감사원을 동원한 황 전 원장은 독립성을 입에 올릴 자격이 없다. 그에게는 “감사원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부당한 간섭이나 시류에 흔들림 없이 감사를 수행해 나갈 때 확보될 수 있다”며 직(職)을 걸고 말할 기회가 적어도 세 번은 있었다.


첫 번째는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12일 만에 4대강 사업에 대한 네 번째 정책감사를 지시했을 때다. 헌법상 독립적 지위를 갖는 감사원에 대해 대통령이 사실상 감사를 요구한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그런데도 황 전 원장은 6월 첫 대통령 대면보고를 하기 전날 때맞춰 4대강 감사 결정을 내려 임기를 지킬 수 있었다.

두 번째는 7월 초 문 대통령의 경남고 후배인 왕정홍 감사위원이 감사원 2인자인 사무총장에, 대선 때 문 캠프에서 법률지원 업무를 맡았던 김진국 감사위원이 임명됐을 때다. 2013년 인사 청문회 서면답변서에서 “정권 관련 인사가 감사위원으로 제청될 경우 감사원의 독립성과 정치적 중립성을 훼손할 우려가 있다”고 밝힌 것을 기억한다면, 황 전 원장은 “감사원 독립성을 흔들지 말라”며 인사 적폐청산에 앞장서야 했다.

세 번째는 10월 국정감사 때다. ‘세월호 관련 감사원의 감사 결과 발표를 미리 받아 코멘트를 주라’는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비망록이 공개되며 세월호 부실 감사를 추궁받은 자리에서 그는 “그때 충실히 감사했더라면 대통령 탄핵 사태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국민 앞에 반성했어야 옳았다. 2014년 세월호 침몰 석 달 후 청와대 감사 때 황 전 원장은 청와대로부터 달랑 의견서를 받아와 대통령에 대한 보고가 “적절히 된 것으로 판단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제는 모두가 아는 일이지만 세월호 참사 이후 감사원이 제대로 감사만 했더라도 그 이후 역사가 바뀌는 일까지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제왕적 통치로 달려가는 대통령책임제에서 정치에 휘둘리지 않고 행정부를 감사·통제하는 기관이 감사원이다. ‘나라다운 나라’를 내건 문재인 정부는 감사원의 독립성과 공정성을 공약했다. 그러나 김종호 공직기강비서관처럼 감사원 출신을 청와대 비서로 임명하는 노무현 시절의 ‘관행’을 답습해서는 감사원의 독립이 가능할지 의심스럽다.

감사원은 2007년 4만여 명의 공무원과 가족들이 쌀 직불금을 부당 수령한 사실을 밝혀내고도 이듬해 정권이 바뀔 때까지 감쪽같이 숨긴 과거가 있다. 당시 감사를 지휘한 사무총장이 감사원 출신으로 노 정부에서 공직기강비서관을 지낸 김조원 한국항공우주산업(KAI) 대표이사다. 노 전 대통령은 “청와대와 감사원의 인사 교류로 감사원의 정치적 중립성이나 독립성이 훼손됐다는 시비를 한 사람은 없다”고 했지만 어림없는 소리다. 감사원 감사 은폐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사람이 현 정부 ‘적폐청산 1호’로 찍혔던 방산비리 기업에 낙하산으로 내려가 방패막이 역할을 하는 것도 관행이 될까 무섭다.

내년 개헌을 논하는 과정에서 감사원은 대통령직속 아닌 의회 소속으로, 기능도 회계감사만으로 바뀔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러나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과 감사원 사무총장, 여기에 낙하산이 지금처럼 연결된다면 감사원의 독립성과 감사의 공정성은 요원할 것이다.
 
김순덕 논설주간 yuri@donga.com
#표적 감사#코드 감사#감사원#적폐청산 1호#황찬현 퇴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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