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주주권행사 뒤 ‘新관치’ 그림자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1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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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대표 추천… 노동이사 찬성표… ‘국민 노후 보장’ 본연의 목적 잃고
정부의 경영개입 수단 악용될 우려

“요즘 분위기대로라면 내년 3월 주주총회 때는 국민연금공단이 사실상 최고 의사결정권자가 될 것입니다.”

국내 유력 금융지주회사의 한 임원은 최근 사내 비공식 임원회의에서 조심스레 이 같은 말을 꺼냈다. KB금융지주 주주총회에서 노동조합이 추천한 사외이사(노동이사) 선임 안건에 국민연금이 찬성표를 던진 것을 보고 ‘국민연금의 기업 경영 행보가 본격 시작됐다’고 본 것이다. 이 임원은 “아무리 기업 경영에 부담이 된다고 하더라도 국민연금이 여론을 등에 업고 주주총회장에서 안건을 내면 현재로선 막을 방법이 없다”며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의 의중을 파악하는 게 회사의 최대 과제”라고 말했다.

기업 의사 결정의 핵심인 인사권 행사에도 국민연금의 힘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국민연금은 최근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북부구간을 운영하는 서울고속도로㈜ 신임 대표이사 후보에 강태구 씨(53)를 추천했다. 국민연금은 이 회사 지분 86%를 가진 대주주다. 국민연금이 지분 보유 기업에 대한 인사권 행사를 공개적으로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금융투자업계 고위 인사는 “국민연금이 주요 주주인 수많은 국내 상장·비상장 회사 경영에 직접 개입하겠다는 신호탄”이라고 해석했다.

문재인 정부가 스튜어드십 코드(기관투자가의 의결권 행사 지침) 도입을 약속하면서 주요 주주로서 국민연금이 기업 경영에 목소리를 내는 것이 제도화될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기금 독립성이 제도적으로 자리 잡지 못한 상황에서 지분 권한을 행사할 경우 국민연금이 기업경영 간섭과 정책 목표 달성을 위한 ‘정부 도구’로 악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KB금융 노동이사 찬성 사례가 대표적이다. 주주 대부분과 국민연금의 공식 자문역인 세계 최대 의결권 자문사 ISS(Institutional Shareholder Services) 등이 “주주 이익에 반한다”며 반대 의견을 냈지만 국민연금은 듣지 않았다. 이 때문에 주주 이익이 아닌 정권 코드에 맞는 주주권 행사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반기범 명지대 교수는 “현재 국민연금 지배구조에서는 정부가 정치 또는 정책적 필요성에 따라 기금을 운용할 수 있다. 여전히 정치 논리가 국민연금 지배구조를 지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국민연금이 국민 노후 보장이라는 본래 목적을 잃고 정부 정책을 실현하기 위한 쌈짓돈으로 쓰여 기금의 안정성을 위협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경영학과 교수는 “국민연금은 국민들의 노후 생활에 도움을 주기 위해 있는 것이다. 대기업 개혁 등 정부 정책을 추진하겠다는 이유로 국민 노후 호주머니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신민기 minki@donga.com·박성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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