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개 기업에 발언권 가진 국민연금, 외풍 차단 장치는 미미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1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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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 ‘정부 경영개입 도구’ 우려]

국민 노후를 책임질 최후의 보루인 국민연금공단이 외풍에 흔들리고 있다. 정권의 입맛에 따라 기업 경영개입 도구, 공약 이행을 위한 쌈짓돈으로 남용된다는 지적이 커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국민연금의 독립성이 담보돼야만 안정적 운용으로 ‘국민 노후 보장’이라는 연금 본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정부가 재벌 개혁 등의 정책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국민연금을 동원하면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를 얻겠지만 장기적으로 기업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한국 경제의 체질만 허약하게 만들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 기업에 막강한 지배력 행사 가능

국민연금은 국내 기업에 막강한 지배력을 휘두를 수 있다. 국민연금의 국내 주식 투자 규모는 124조3000억 원(올해 8월 말 기준)에 달하고 지분 5% 이상을 보유한 기업은 275곳(10월 말 기준)이다. 삼성전자와 포스코, 네이버 등의 최대주주가 국민연금이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경영과 관련한 의사 결정을 할 수 있고 인사권 행사도 가능한 구조다. 국민연금이 의결권을 행사하는 것 자체는 문제를 삼기 어렵다. 문제는 기업에 막강한 힘을 가할 수 있는 국민연금이 정치 외압을 이겨내기에는 터무니없이 허약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국민연금공단은 보건복지부 산하 공공기관이다. 이사장은 복지부 장관이 임명하도록 해 사실상 청와대가 인사권을 행사한다. 기획재정부의 경영평가도 받는다. 이달 취임한 김성주 신임 이사장은 더불어민주당 의원 출신으로 현 정부 출범 초기 국정기획자문위원회 자문단장을 지냈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공공기관 특성상 주주권 행사에 정부 영향력이 어떤 식으로든 가해질 수 있다. 가입자 이익이 아닌 다른 목적을 위해 활용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정치적 의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구조를 갖고 있어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에는 늘 외압의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이 논란이 되고 있는 게 대표적인 사례다. 특검은 청와대가 복지부를 통해 국민연금을 압박해 합병을 성사시켰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최근 법원은 합병의 목적과 절차가 합법적이라는 민사 판결과 그렇지 않다는 형사 판결로 엇갈린 판단을 내렸다.

○ 정부 쌈짓돈으로 전락

국민연금 기금이 정부 정책 추진의 재원으로 활용되는 것을 둘러싼 논란도 뜨겁다. 일정 수준의 수익률만 달성하면 되는 게 아니냐는 반박도 있지만 국민연금 기금이 ‘정부 쌈짓돈’으로 전락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국민연금을 활용해 공공투자를 확대하겠다고 공약으로 내건 게 대표 사례다. 정부가 보육시설 확충, 임대주택 건설, 요양분야 사업 등을 추진하기 위해 국공채를 발행하면 이를 국민연금이 사들이는 방식으로 기금을 예산처럼 쓰겠다는 계획이다. 정부 의지에 발맞춰 국민연금공단은 ‘국민연금 공공투자가 국민연금기금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 용역을 진행하고 있다. 1차 결과는 다음 달 중순 마무리된다.

지난해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은 국민연금 기금에서 매년 10조 원씩 10년간 100조 원을 들여 공공장기임대주택과 보육시설에 투자하겠다는 공약을 내놨다. 윤석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은 “국회 토론회 등에 가보면 국회의원들이 저마다 자기 지역구에 국민연금 기금으로 어린이집을 짓거나 고속도로를 깔겠다는 공약을 한다”고 말했다.

과거 정부도 국민연금 기금을 활용하려는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박 전 대통령은 대선 공약이었던 기초연금의 필요 재원 일부를 국민연금에서 충당하겠다고 밝혔다가 반발에 부딪혀 공약 자체를 축소하기도 했다. 남재우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국민연금이 국공채에 투자하는 방식으로 공공투자를 할 경우 회계상으로도 정부 부채로 잡힌다. 결국 나랏빚이 늘어나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 해외 연기금은 정부와 독립

해외 주요 연기금들은 정부로부터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수단을 쓴다. 기금 운용과 관리조직을 분리하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모범적인 연기금으로 꼽히는 캐나다 공적연금(CPP)은 1990년대 기금 고갈 위기에 직면했던 적이 있다. 정부의 잦은 간섭이 원인으로 꼽혔다. 캐나다 정부는 과감히 메스를 댔다. 1998년 캐나다연금투자위원회(CPPIB)를 설립하고 금융·경영 전문가를 모아 경영진을 꾸렸다. 기금 운용의 독립성을 보장하고 최고경영자(CEO)의 임기 제한도 없앴다.

유럽 2위 규모 연기금인 네덜란드 공적연금(ABP)도 비슷하다. 2008년에 자회사로 자산운용공사(APG)를 설립해 기금 운용 독립성을 보장한다. 2014년부터는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수탁자위원회에 연금 수급자 대표가 참여하도록 했다. 박유경 APG 아시아지배구조 담당이사는 “의사결정 구조가 외부 목소리로부터 완전히 보호되기 때문에 독립성이 훼손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운용 기금 대부분을 위탁운용하는 일본 공적연금(GPIF)은 의결권도 외부 자산운용사가 직접 행사한다. 의결권을 정부가 직접 행사할 경우 필연적으로 외풍 꼬리표가 따라다닐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캐나다연금투자위는 매년 책임투자보고서에서 의결권 행사 내용을 공개한다. 의결권 행사 기준은 기업의 장기성과를 높이고 투자 손실 위험을 줄이는 데 초점을 맞춘다.

신민기 minki@donga.com·박성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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