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은철의 스토리와 치유]<11>언어의 햇빛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1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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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상처는 어둡고 축축한 환경에서는 잘 낫지 않는다. 상처에 햇빛이 필요한 이유다. 마음의 상처도 마찬가지다. 혼란과 무질서의 어둠 속에서는 잘 낫지 않는다. 마음의 상처에도 햇빛이 필요한 이유다. 두 상처의 다른 점은 하나는 자연의 햇빛이, 다른 하나는 언어의 햇빛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왜 언어가 햇빛일까. 혼란과 무질서를 정돈과 질서로 바꿔주는 상징이기 때문이다.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은 그것의 무질서를 언어, 즉 질서로 바꾸는 것이다. 일상적 의미의 언어. 음악, 회화, 춤 등에서 사용하는 은유적 의미의 언어. 모두가 햇빛이다.

서정주 시인의 ‘자화상’은 그 햇빛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좋은 예이다. 이 시는 상처의 무질서가 어떻게 언어의 질서로 바뀌는지를 보여준다.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첫 행만 보고도, 우리는 화자가 자신의 내면에 오랫동안 들어앉아 있던 상처를 고백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한다. 화자는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손톱이 까만 에미’와 더불어 아버지를, 누군가를 섬기는 ‘종’이기에 밤이 되어도 오지 않는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다.

그것이 암시하고 환기하는 마음의 풍경을 상상해 보라. 그것이 상처가 아니고 무엇이랴. 그래서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라는 고백은 아픈 상처의 고백이다. 자신이 쓰는 시에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으며, 자신이 ‘혓바닥 늘어뜨린/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살아왔다는 자조의 소리는 상처의 소리다.

그래서 시인이 스물세 살에 썼다는 ‘자화상’은 상처의 노래다. 스물세 살의 청년은 자신의 상처를 언어로 바꿔 놓았다. 상처의 무질서가 언어로 대체되면서 일종의 질서가 생겼다. 그러면서 시인은 치유까지는 아니어도 상처를 언어로 풀어내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동력을 얻었다. ‘자화상’에서 처연함과 힘, 결기가 느껴지는 이유다. 그런데 자화상의 함정은 한 번만으로는 자아의 온전한 모습을 포착하기가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고흐가 자화상을 반복하여 그렸던 것은 한 번으로는 자아의 변화하는 모습들을 포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정주 시인에게는 자화상이 스물세 살의 것, 딱 하나만 있고 이후의 삶에 대한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와 좌절감을 안겨준 노년의 모습까지 포함된 자화상들을, ‘애비는 종이었다’라는 놀라운 말이 환기하는 분연한 용기를 갖고 더 많이 그렸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그가 사용하지 않은 언어의 햇빛이 못내 아쉽다.
 
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교수
#상처에는 햇빛이 필요하다#서정주 시인의 자화상#언어의 햇빛#스물세 살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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