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동정민]유럽도 ‘아직은 미국’이라고 한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1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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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민 파리 특파원
동정민 파리 특파원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9월 말 프랑스가 한반도 정세 불안을 이유로 평창 겨울올림픽 불참을 고려한다는 기사가 괜히 나온 건 아니다.

북한 핵도발이 이어지면서 유럽 언론들은 올해 내내 북한 기사로 국제면을 도배하고 있다. 유럽 언론의 북한에 대한 관심은 상상 이상이다. 프랑스 일간 르피가로가 김정은 여동생 김여정이 누구인지 자세히 소개할 정도다. 한반도를 보는 위기의식도 우리보다 훨씬 크다. 올여름 북-미 갈등이 고조될 무렵 르피가로 온라인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40% 이상이 한반도에 전쟁이 날 수 있다고 답했다. “한국의 너희 부모님은 괜찮냐”고 묻는 프랑스인도 꽤 있다. 한반도 하면 북한과 김정은을 가장 먼저 떠올리는 유럽인들이 늘고 있다는 건 우리에게 유쾌한 일은 아니다.

실제 프랑스 대통령이나 독일 총리가 요즘처럼 북한에 관심을 보인 적도 없었다. 북핵 문제 중재에 나서겠다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긴장 고조 발언을 삼갈 것을 요구했다. 이 때문에 유럽이 대북 문제에 있어 트럼프 대통령과 다른 길을 걸을 것으로 기대하는 이들이 있다면 순진한 생각이다.


유럽연합(EU)은 어느 때보다 강도 높은 대북 제재를 발표하고 있다. 보수 박근혜 정권이 북한 노동자 송출 금지와 북한대사관의 영리활동 금지를 추진해 달라고 줄기차게 요구할 때마다 시큰둥했던 EU 회원국들은 오히려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 이후 박근혜 정부가 요청한 조치들을 알아서 시행하기 시작했다. 막무가내식 북한 도발에 실망감이 커진 까닭도 있지만 미 트럼프 정부의 강경 기조에 결을 맞추기 위한 측면을 부인하기 어렵다. EU가 올해 초 북한과 중재에 나서겠다고 발표하려다가 섣불리 대화 이야기를 꺼낼 경우 북한에 잘못된 메시지를 줄 수 있다는 미국의 제동으로 중단했다는 게 외교 관계자의 후문이다.

유럽이 아무리 중국과 가까워졌다지만 안보 분야에서 중국은 여전히 유럽의 적국에 가깝다. 그들이 중국을 바라보는 시각은 북한을 바라보는 미국 시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독일과 프랑스의 주도로 EU는 국가 시설에 중국의 무분별한 투자를 차단하는 법안을 추진 중이다. 영국 테리사 메이 총리가 집권하자마자 힝클리포인트 원전의 중국 계약 참여에 제동을 걸었던 것도,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중국과 합작하고 있는 이탈리아 기업의 STX 인수에 제동을 걸었던 것도 중국에 중요한 국가 기반시설 정보가 넘어갈 수 있다는 우려가 주요 논리 중 하나였다.

흔히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할 말을 다 하는 ‘여제’ 이미지가 강하다. 그러나 안보 문제만큼은 ‘참을 인’자를 가슴에 새긴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분담금을 더 내라고 압박할 때마다 메르켈 총리는 “더 많이 낼 테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저자세로 일관한다. 속으로야 “너희가 영향력 넓히려고 나토 운영하는 것 아니냐” “그럴 바에야 우리는 EU 군대를 독자적으로 창설하겠다”고 말하고 싶겠지만 입 밖에 내지 않는다. 국가 최후의 보루인 안보는 연습이 없기 때문이다. 안보는 자존심 혹은 돈 몇 푼의 실리와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박근혜 정권은 보수 정권치고 중국에 꽤 많은 공을 들였다. 2015년 중국 전승절 열병식에 참여했을 때는 유럽의 많은 국가도 놀랐다. 그러나 북한에 안보 위협을 느낀 한국이 사드를 배치하자 미국발 안보 위협을 느낀 중국은 바로 한국에 등을 돌렸다.

아직까지 안보는 미국이다. 우리보다 안보 위기가 덜한 독일, 프랑스, 영국이 미국 눈치를 보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

동정민 파리 특파원 ditto@donga.com
#프랑스 평창올림픽 불참#북한 핵도발#대북제재#앙겔라 메르켈#트럼프#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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