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치마로 한강 뜨면 구경꾼 우르르… ‘풍기문란’ 경찰에 연행도”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1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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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피겨스케이팅 1호 선수 홍용명 여사

한국 피겨의 역사가 담긴 앨범 사진을 펼쳐 보이며 활짝 웃고 있는 홍용명 여사.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한국 피겨의 역사가 담긴 앨범 사진을 펼쳐 보이며 활짝 웃고 있는 홍용명 여사.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그 시절에 치마를 휘날리며 스케이트를 타고 있으니 혹했겠지.”

꽃답던 10대 시절을 떠올리니 새삼 부끄러워졌는지 피겨 원로 홍용명 여사(85)는 수줍게 웃었다. 중국에 머물다 1946년, 광복한 지 1년 뒤 고국으로 돌아온 홍 여사는 당시 국내 겨울 스포츠의 메카였던 덕수궁과 창경궁(당시 창경원) 연못, 한강 등지를 누비던 스타였다. 화려한 연기로 뭇 남성을 잠 못 들게 한 원조 피겨 요정이다.

지난달 27일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 사옥에서 만난 홍 여사는 자신의 현역 시절을 ‘호랑이 담배 피울 적’이라고 표현했다. 그만큼 한국 피겨계의 위상은 반세기 전 홍 여사가 뛰던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 어느새 김연아라는 올림픽 챔피언도 탄생했다. 상전벽해가 따로 없다. 무엇보다 눈앞으로 다가온 평창 겨울올림픽은 홍 여사의 가슴을 뛰게 한다. 그에게 한국 피겨계의 초석을 다져온 지난 세월과 평창 올림픽을 앞둔 감회를 전해 들었다.

축구화 밑창 뜯어 스케이트로 개조
단골 연습장은 청량리 미나리밭


첫걸음을 뗀 곳은 중국이었다. 홍 여사는 평남 안주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따라 중국 베이징의 한 초등학교에 다니며 피겨스케이팅을 배웠다. “우연히 이마다 에스코란 일본 피겨 선수의 시범 경기를 봤어요. 적국의 선수지만 어찌나 아름답던지… 그걸 보고 마침 다니던 중국 학교에 빙상부가 있어서 피겨를 시작했답니다.”

조국이 광복을 맞이하자 홍 여사의 가족은 한국(서울)으로 돌아왔다. 부푼 마음으로 고국 땅을 밟아 피겨스케이팅을 계속하려 했지만 난관에 부닥쳤다. 스케이트를 살 곳이 없었다. 고물상까지 뒤졌지만 허사였다. 홍 여사가 떠올린 방법은 축구화 개조.

“그 사이 발이 커져 새 스케이트가 필요했어요. 하지만 당시 한국에 제대로 된 스케이트가 있었겠어요? 누군가 신다가 버린 스케이트가 있나 해서 고물상까지 가봤지만, 발에 맞는 건 없었어요. 할 수 없이 충무로의 한 양화점(구둣방)을 찾아가 축구화를 사서 밑창을 뜯어내고 날을 덧붙여 스케이트를 만들었죠. 그만큼 피겨를 하겠다는 의지가 강했어요.”

1950년대 초 피겨 원로 홍용명 여사가 당시 국내 겨울스포츠의 메카 중 한 곳이었던 덕수궁 연못에서 피겨 스케이팅을 하고 있는 모습. 홍 여사는 덕수궁을 비롯해 청량리 미나리밭, 창경원(창경궁), 한강 등지에서 피겨 스타로 인기를 끌었다.
1950년대 초 피겨 원로 홍용명 여사가 당시 국내 겨울스포츠의 메카 중 한 곳이었던 덕수궁 연못에서 피겨 스케이팅을 하고 있는 모습. 홍 여사는 덕수궁을 비롯해 청량리 미나리밭, 창경원(창경궁), 한강 등지에서 피겨 스타로 인기를 끌었다.
어렵게 스케이트를 마련한 홍 여사는 겨울철 얼음판을 찾아다니며 피겨를 즐겼다. 서울에서 가장 먼저 얼음이 얼던 청량리 미나리밭이 홍 여사의 단골 무대. 덕수궁과 창경궁의 연못, 한강 또한 홍 여사가 자주 찾던 곳이다.

홍 여사가 떴다 하면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르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당시 꽃 같은 얼굴을 한 소녀가 힘차게 얼음판 위를 달리고 있으니 이만한 구경거리가 또 없었다. 한강에서 연습할 때면 사람이 너무 몰려와서 ‘얼음이 깨질 것 같다’는 불안감이 들 정도였다. 물론 그중에 태반이 남자.

“스케이트를 신는 데 시간이 꽤 걸렸어요. 줄을 꿰어야 하는 구멍이 많았죠. 빙판 옆에 앉아 줄을 묶고 있으면 남자들이 몰려와 ‘내가 신겨줄게’라며 다투기까지 했어요.(웃음)”

수많은 구경꾼 앞에서도 당당하게 얼음판을 누빈 그는 이화여중 피겨부 창단 멤버로 스카우트됐다.

연못 위로 난 다리를 경계 삼아 종목별 훈련 장소를 나누던 때였다. 다리 너머로는 스피드스케이팅, 안쪽으로는 피겨 선수가 쓰는 방식이었다. 뉘엿뉘엿 해가 지기 시작하면 마감을 알리는 ‘땡땡땡’ 종소리가 들렸다. 그러면 훈련하던 선수들은 빙질이 엉망이 된 얼음판에 물을 뿌리고 평평하게 다듬었다. 다음 날 훈련을 위해서였다. 그 일이 다 끝나야 비로소 짐을 쌌다. 한국 겨울스포츠의 역사가 움트던 1950년대 덕수궁과 창경궁 연못의 풍경이다.

당시 피겨를 비롯해 국내 빙상 종목의 훈련 모습은 대체로 그랬다. 선수들을 따로 지도해줄 코치도, 정식 피겨복도 없었다. 선수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해외 피겨 선수가 나온 잡지를 보고 따라 하고, 안에 얇은 옷을 입고 거기에 치마를 두르는 게 의상의 전부였다.

때론 야외 테니스 코트를 얼려서 연습장으로 썼다. 날이 풀려 얼음이 녹을 만하면 더 추운 곳을 찾아 서울을 떠났다. “덜컹대는 트럭을 타고 강원도로 떠나기도 했어요. 1년에 연습할 수 있는 시기는 겨울 한철이었으니까요.” 연중 아무 때나 찾을 수 있는 실내빙상장은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시기였다.

기술교본 없어 해외잡지 따라해
반회전 점프만 해도 다들 놀라


이처럼 모든 것이 열악하고 어려운 시절이었다. 홍 여사는 그런 와중에도 국내 피겨계의 꽃으로 활짝 핀다. 1948년부터 1957년 사이 열린 4번의 전국여자피겨선수권 대회에서 모두 정상에 올랐다. “그땐 뭐 대단한 기술이 있었겠나. 1회전, 아니 반 회전 점프만 해도 놀라던 때이니.”

이렇게 겸손하게 말했지만 기술 교본 하나 없던 그때 춘천과 화천 등 조금이라도 더 추운 곳을 찾아 독하게 훈련하지 않았다면 결코 이룰 수 없던 성과였다. 홍 여사에게 춥고 배고픈 겨울은 오히려 비상(飛翔)을 꿈꾸던 행복한 계절이었는지 모른다.

그런 열정을 알기나 했을까. 당시 시대상 탓에 웃지 못할 촌극도 여러 번 벌어졌다. 그중 하나는 1953년 어느 겨울날이었다. 한강에서 당시 이해정과 짝을 지어 페어 시범 경기를 펼치던 홍 여사가 ‘풍기문란’으로 경찰서에 연행됐다. 홍 여사가 입고 있던 짧은 치마도, 대낮에 남녀가 손을 잡고 있는 것도 모두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에서다.

“방망이 든 경찰이 호루라기를 불면서 달려왔죠. (경찰이) 얼음판 위에선 잘 움직이지 못하니깐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야단쳤어요. ‘문란하기 짝이 없다’라고 했던가? 너무 창피했어요. 그때 이해정 씨가 ‘스포츠다’며 옥신각신 다퉜죠. 경찰서까지 가서 겨우 설득하긴 했지만 이후에도 몇 번 그런 적이 있었어요.”

코치 시절인 1969년 피겨 선수들과 일본 전지훈련을 떠난 홍용명 여사(왼쪽에서 세 번째)는 한국 피겨계가 세계무대로 나아가는 계기를 마련했다. 홍용명 여사 제공
코치 시절인 1969년 피겨 선수들과 일본 전지훈련을 떠난 홍용명 여사(왼쪽에서 세 번째)는 한국 피겨계가 세계무대로 나아가는 계기를 마련했다. 홍용명 여사 제공
홍 여사는 1950년대를 끝으로 현역에서 물러나 빙상연맹 임원 등을 맡으며 후학 양성에 힘을 쏟는다. 심판으로도 활동했다. 국내 최초로 실내 빙상장(동대문실내스케이트장·1964년 1월 개장)도 생겼다.

1960년대 말 한국 피겨계는 해외로 눈을 돌린다. 1966년 일본에서 열린 전국선수권대회(일본)에서 시범 경기를 가졌다. 홍 여사는 한국 피겨가 해외에 첫선을 보인 이 순간을 지도자로 지켰다. 홍 여사는 1967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세계선수권에도 코치 자격으로 후배 장명수(당시 초등학생)를 데리고 갔다. 연령 미달로 정식 경기엔 참여하지 못했지만 홍 여사의 간청으로 2분간 시범 경기를 펼쳤다. 한국 피겨의 첫 유럽 무대 데뷔전이다.

“일본 전지훈련을 다녀오고 나서 자신감이 붙었어요. 그래서 이 대회(빈 세계선수권) 출전을 고집했죠. 여차여차해서 결국 시범 경기에 색동저고리를 입혀 장명수를 내보냈는데 어찌나 예쁘던지 유럽 선수들이 줄지어 사인 받으러 왔어요.” 그 이듬해 한국 피겨는 프랑스 그르노블에서 열린 겨울올림픽에 사상 최초로 한국 선수를 출전시킨다.

1970년대 신혜숙 코치 등의 일본 유학길을 터준 사람도 홍 여사였다. 신 코치는 김연아가 초등학생 때 점프의 기본을 익히게 했고, 2014년 소치 겨울올림픽에선 함께 은메달을 일궈내 현재 한국 피겨계의 대모로 불리는 지도자. 당시 앞서 가던 일본의 피겨 기술을 익힐 필요가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선수들의 학교를 돌아다니며 (유학) 추천서를 받아 문교부에 제출하느라 애먹었습니다. 그런 고생을 해서라도 한국 피겨계가 발전했으면 하는 마음뿐이었어요.”

지금도 새벽부터 후배 경기 챙겨
김연아 소치 銀메달 따는데 밑거름


한국 피겨의 살아 있는 역사였던 홍 여사는 1980년대, 개인 학업 등의 이유로 빙판을 떠나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지냈다. 1991년 강원 삼척에 정착한 뒤 꼬박꼬박 국내 피겨 대회를 찾아다니며 후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경기장에 못 갈 때면 인터넷에 올라온 후배들의 경기 영상을 일일이 찾아볼 만큼 애정을 보였다.

“피겨계에 직접 몸담고 있진 않았지만 한시도 잊은 적은 없어요. 꼭두새벽부터 버스를 타고 전국의 피겨 대회를 챙겨 봤죠. 몸은 좀 고달파도 후배들의 멋진 공연을 본다는 생각에 늘 설렜습니다.”

피겨를 향한 기대와 관심을 놓지 않던 홍 여사는 여든 살에 가까워 기적을 만났다. 2010년엔 손녀뻘 되는 후배 김연아가 밴쿠버 겨울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걸 TV로 지켜봤다. 그 이듬해엔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울려 퍼진 평창의 겨울올림픽 개최 소식도 전해 들었다. 그때마다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이 땅에 이렇게 훌륭한 선수가 나오고, 겨울올림픽이 유치되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어요.”

잔잔하던 노후 생활에 평창 올림픽이라는 거센 물결 하나가 그의 가슴에 일렁인다. 후배들이 일궈낼 평창의 기적을 자신의 두 눈에 모조리 담고 싶다. 생(生)의 새로운 활력이 샘솟았다. 평소 건강관리를 위해 하는 게이트볼을 더 열심히 하고 아프지 않도록 조심하게 됐다.

내년 2월 올림픽 개막을 손꼽아 기다린다는 홍 여사의 눈앞에 요즘따라 50년 전인 1967년 그때가 아른거린다. 장명수를 데리고 빈에서 열린 세계선수권 대회에 나갔을 때다. 사람들은 태극기를 들고 가도 “어디(나라)에서 왔어요”라고 물었다. 선수 식당에는 홍 여사와 장명수가 앉은 테이블에만 국기가 마련돼 있지 않았다. 출신국이 어디냐는 질문에 대한민국이란 나라를 여러 번 설명해야 했다. 대한민국은 생소한 나라였고 그래서 서럽고 눈물 나던 지난날이다.

“그랬던 나라에서 이제 겨울올림픽이 열린다니 꿈꾸는 기분입니다. 후배들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됐으면 좋겠네요. 선수 때처럼 몸 관리하며 그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국 겨울스포츠가 활짝 꽃필 내년, 평창의 겨울 말입니다.”
 
김재형 기자 monami@donga.com
#국내 피겨스케이팅 1호 선수#홍용명#김연아#피겨스케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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