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전성철]국정원을 죽일 셈인가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1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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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철 사회부 차장
전성철 사회부 차장
국가정보원 적폐청산 태스크포스(TF)의 조사로 드러난 국정원의 과거는 지켜보는 사람이 창피한 수준이다. 대북 심리전을 수행해야 할 조직이 국내 정치에 차출돼 야당은 물론 청와대에 비판적인 여당 정치인, 학자 등을 비판하는 데 열을 올린 것은 반(反)민주적 범죄다. 보수단체를 동원해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 취소를 노벨위원회에 청원한 일은 지시한 사람의 머릿속이 어떻게 생겼나 궁금할 정도로 낯 뜨거운 일이다.

정부의 여러 부처 중에서도 국정원은 손가락 안에 드는 엘리트 조직이다. 직업 공무원의 인기가 지금보다는 못하던 시절에도 국정원은 명문대 졸업생들이 재수, 삼수를 하며 들어가려고 줄을 서던 곳이다.

그렇게 똑똑한 사람들이 모인 조직이 왜 이리 망가졌을까. 그 답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쑥대밭이 된 문화체육관광부를 보면 알 수 있다. 정부에 비판적인 문화예술인에게 불이익을 주는 블랙리스트 사업에 소극적이었던 이들은 대부분 쫓겨나거나 인사 불이익을 당했다. 반대로 청와대의 지시를 받들어 블랙리스트 실행에 적극적이었던 이들은 정권이 바뀌면서 감옥에 갔다.

국정원의 상황도 문체부와 다르지 않았다. 국정원 직원들은 명령에 따르느냐, 불복종할 것이냐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했다. 상명하복을 요구하는 국정원에서 지시를 따르지 않는 것은 그만둘 각오를 해야 가능한 일이다.

반면 윗선의 명령에 따라 불법에 가담하는 일은 상대적으로 덜 위험한 선택지였다. 정보기관의 캐비닛이 열리고 조직이 저지른 불법이 폭로되는 건 혁명이 일어나거나 나라가 망하지 않으면 안 일어날 확률 낮은 일이기 때문이다. 국정농단 사건이나 탄핵의 기폭제가 된 ‘촛불혁명’ 같은 건 당연히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시키나’ 욕을 하면서도 명령에 따르는 것은 국정원 직원들에게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드러난 잘못에 대해서는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단지 불법인 줄 알고도 따랐다는 이유로 ‘생계형 범죄자’인 하급자가 형사처벌을 받는 상황은 가혹하다. 검찰 수사와 형사 처벌은 적폐청산 TF의 저인망식 훑기가 아니라 책임이 확실한 사람만 겨눠야 한다.

국정원의 실무자들에게 형사적 관용을 베푸는 일은 국익을 위해 필요하다. 국정원 직원들은 국정원장의 지시는 곧 국가의 지시라고 믿고, 언제라도 따라야 하는 이들이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국가를 위해 죽으라는 명령에도 복종해야 한다. 이번처럼 조직이 시키는 일을 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간다면 앞으로 누가 국정원장의 지시를 따를 것이며, 그런 정보기관을 어디에 써먹겠는가.

2013년 여름 ‘댓글 사건’ 수사 때 채동욱 당시 검찰총장은 법무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공소장에 포함시켰다. 그 대신 원세훈 전 국정원장 한 사람만 기소했다. 정치 상황이 바뀌고 수사를 막는 장애물이 사라졌지만 무엇이 국익인지는 여전히 고민해볼 일이다.

수사 과정에서 피의사실 공표도 최소화해야 한다. 국정원이 한 일이 연일 밤낮으로 언론에 중계되는 현 상황은 정상이 아니다. 과거 검찰은 국정원을 수사할 때, 보안에 해당하는 내용은 최대한 가려주려고 노력했다. 국정원이 힘 있는 기관이어서 봐준 게 아니다. 정보기관에 보안은 장사 밑천이기 때문이다. 보안이 안 지켜지는 정보기관과 정보를 주고받을 기관이나 사람은 없다. 수사는 환부를 도려내고, 병든 국정원을 살리는 일이어야 한다.
 
전성철 사회부 차장 dawn@donga.com
#국가정보원 적폐청산#생계형 범죄자#댓글 사건#채동욱 전 검찰총장#병든 국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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