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정동]‘13억4000만 원 세대’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0월 27일 03시 00분


코멘트

67억짜리 자체개발 무인기
시험비행 중 추락 파손되자 연구원 5명에 균등배상 요구
수많은 시행착오는 필연적
실수는 원인 분석-기록 후 개선해야 혁신 나올 수 있어
청년기술자들 깊은 자괴감
나중에 도전의식 가로막는 집단적 검열기제 되지 않겠나

이정동 객원논설위원 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
이정동 객원논설위원 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
미디어를 통해 알려진 사실만으로 사건을 재구성하면 이렇다. 작년 여름 한 공공연구소가 무인기를 자체 개발하면서 시험비행을 했는데 시제기가 추락했다. 관련 기관이 감사를 하고 난 후 시험비행에 참여한 연구원 5명이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것으로 판정하고, 시제기 제작 비용 67억 원을 1인당 13억4000만 원씩 나눠 배상토록 요구했다. 모르고 지나갈 뻔했던 이 사건이 국회 국정감사를 통해 언론에 알려졌다. ‘시험비행 중 추락, 67억 손실’이라는 검고 큼지막한 제목과 함께. ‘국가재정을 축낸 능력 없는 사람들에게 응분의 조치를 했다’는 프레임이 행간에서 분명하게 읽히는 듯하다.

사건이 알려진 후 산업현장이든 연구현장이든 과학기술자들이 모인 곳이라면 예외 없이 화제가 됐다. 황당하다는 이야기가 쏟아졌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포털의 뉴스 댓글판이 뜨거웠다. 최근 이 처분 결과의 취소를 요구하는 유학생이 청와대에 청원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감사기관, 국회, 언론을 포함해서 관련된 곳 그 어디에서도 ‘진의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는데, 사실은 이렇습니다’라는 보충설명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그래서 안타깝지만, 지금까지 대중에게 알려진 정황만으로는 위에서 말한 프레임대로 이 스토리를 해석하는 수밖에 없다.

이 모든 사달은 선진국의 기성품 무인기를 사오는 쉬운 길을 선택하지 않고 우리도 한번 만들어 보자고 시도한 데서 시작됐다. 신이 아닌 이상 무언가 새로운 것을 설계해 보자고 덤벼드는 순간 시행착오는 필수적이다. 이런 시행착오는 이번 사건에서처럼 아주 단순한 인적 실수에서부터 원인조차 알기 어려운 복잡한 것까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만약 테스트를 할 때마다 척척 성공을 거둔다면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이미 남들이 해본 쉬운 문제이거나 도전적이지 않은 아주 안전한 설계만 한 것은 아닌지 의심해야 한다.

새로운 개념을 시도하면서 생긴 시행착오에 대한 올바른 반응은 그런 시행착오가 다시 생기지 않도록 원인을 꼼꼼히 분석하고, 기록하며, 개발 프로세스를 개선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꾸준히 반복해야 남들이 갖지 못한 경험을 축적한 혁신조직이 탄생하고, 흉터 가득한 고수가 길러지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번 일도 그 규모나 원인과 상관없이 중요한 경험자산의 일부로 전환해서 잘 활용해야 한다.

연구원들이 각자 개인적으로 물어내야 할 13억4000만 원이라는 금액도 분명 감당 못할 큰돈이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일반 국민, 특히 기술자들의 인식체계에 미칠 부정적 영향이다. 아마 많은 과학기술자들이 겉으로는 안됐다고 생각하면서도 속으로는 다음 과제를 기획할 때 혹시라도 실수가 있을 수 있는 일을 가급적 피하려고 할 것이다. 그뿐일까? 언뜻 훑어본 댓글들에서 드러난, 특히 미래세대 기술자들의 자괴감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외국 유학 중인 이공계 박사과정 학생이 한국으로 돌아가지 말아야 할 이유를 처절하게 깨달았다고 한 이야기, 빨리 공무원시험으로 돌아서거나 의사, 변호사처럼 면허증을 따는 길로 먼저 나섰던 친구들이 부럽다고 하는 이야기는 지금 이 사건이 10년 뒤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잘 보여준다.

‘코호트 효과’라는 것이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세대’처럼 특정 시기에 큰 영향을 미쳤던 사건을 공동으로 경험한 세대가 보이는 공통된 행동 특성을 일컫는 말이다. 혹여 ‘13억4000만 원 세대’라는 말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된다. 지금 자라나고 있는 청년 기술자들이 우리 사회의 리더가 됐을 때 ‘13억4000만 원’이라는 숫자가 잠재의식 깊숙이 숨어들어 의사결정의 순간마다 도전의식을 제어하는 자기 검열의 기준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이것이 이번 사태의 진정한 문제점이다.

한번 형성된 부정적 코호트 효과를 바꾸려면 그보다 더 큰 반대 충격을 줘야 한다. 국회와 언론을 포함해서 우리 사회의 현재 담론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왜 이런 반(反)혁신적인 감사 결과가 나왔는지, 그 사고방식을 지배하는 프레임을 정확히 드러내고 바로잡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리고 방법이 잘 떠오르지 않지만, 무엇보다 젊은 엔지니어들의 가슴속에 깊이 파인 상처를 어떻게든 치유하는 노력을 다함께 해야 한다. 마음 같아서는 모금운동이라도 해서 우리 산업의 미래를 짊어진 청년 엔지니어들에게 우리 사회가 아직은 도전하고 시행착오를 겪어도 괜찮은 곳이라는 믿음을 주었으면 싶다.
 
이정동 객원논설위원 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
#집단적 검열기제#청년기술자#코호트 효과#도전의식 제어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