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팔 빼곤 멀쩡한 뼈 없지만, 첫 2000승 ‘기록의 사나이’ 박태종 기수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0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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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식 전문기자의 人]‘한국 경마의 전설’ 박태종 기수

2016년 5월 ‘강호천년’과 2000승째를 합작한 박태종 기수가 결승선 통과 직후 손을 들어 팬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한국마사회 제공
2016년 5월 ‘강호천년’과 2000승째를 합작한 박태종 기수가 결승선 통과 직후 손을 들어 팬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한국마사회 제공
안영식 전문기자
안영식 전문기자
1만3600전 2021승, 승률 14.9%(2017년 10월 13일 현재).

어떤 스포츠의 누구일까. 그의 기록 몇 가지를 더 살피다 보면 무슨 종목인지 눈치 챌 수 있다. 복승률 28.5%, 연승률 40.0%, 2착 1856회, 3착 1557회, 4착 1466회, 5착 1285회. 경마다. ‘한국 경마의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는 박태종 기수(52)의 30년 성적표다. 그의 닉네임은 결코 과하지 않다. 한국 경마 최초, 최다 타이틀은 대부분 그가 갖고 있다. 최초 500승, 1000승, 1500승, 2000승 달성과 최초 1만 회 기승, 최다 대상경주 우승(39회) 등. 그러나 박태종이 후배들의 진정한 롤모델, 전설로 불리는 것은 이 같은 뛰어난 성적 때문만이 아니다. 그가 지난 30년간 보여준 성실함과 열정, 집념의 스토리가 박태종을 ‘거인’의 위치로 끌어올린 것이다.

박태종에게 2016년은 기쁨과 절망이 교차한 한 해였다. 5월 대망의 2000승 고지에 올랐지만 9월 낙마사고로 역대 가장 긴 재활기간(10개월)을 보내야만 했다.

주변에서는 은퇴를 예상했다. 하지만 그는 올해 경주로에 복귀한 지 2주 만에 ‘전설의 귀환’을 알렸다. 7월 8일 렛츠런파크 서울(과천경마장) 제10경주에서 중반까지 하위권에 머물다 결승선 200m를 앞두고 특유의 추입력으로 역전승을 거뒀다.

“세 번째로 파열된 오른쪽 무릎십자인대 수술을 하는 김에 예전에 다친 왼쪽 무릎인대 수술도 함께 받았다. 그래서 이번 재활치료 때는 아내가 진짜 고생 많았다. 집(경기 의왕)에서 병원(서울)까지 매일 나를 실어 날랐다. 그리고 치료가 끝날 때까지 매일 5시간 이상 병원 근처 커피숍에서 대기했다.”

박 기수는 그동안 장기 입원만 10차례 넘게 했다. 머리와 팔을 제외하고, 모든 뼈가 한 번 이상씩 부러졌다. 그런데 기수의 실력과 낙마사고는 별개란다.

“우선은 말이 어떤 돌발행동을 할지 예측할 수 없다. 그리고 자동차 운전처럼 내가 잘못하지 않아도 사고는 발생한다. 가장 아찔한 사고는 1999년 척추압박골절이다. 당시 내가 말에 깔리고 짓밟히는 장면을 본 팬들이 ‘영안실로 갔는데, 박 기수 영정이 안 보여 입원실로 왔다’고 하더라.”

충북 진천이 고향인 박태종은 경마 기수라는 직업이 있는지도 몰랐다. 원래 희망은 택시 운전사였다. 고교 졸업 직후 이모부가 운영하는 채소가게 일을 돕기 위해 상경한 그는 용달차로 배달을 할 때마다 서울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지리를 익혔다. 건설현장에서 굴착기 기사 보조로도 일했다.

“강원도 춘천까지 굴착기 기사 시험을 보러 갔는데, 나이가 몇 개월 부족하다고 퇴짜를 맞았다. 지원서 접수 때는 아무 말이 없었는데, 너무 억울했다.”

박태종에게 경마 기수는 글자 그대로 천직(天職)인가 보다. 실제 그는 호적보다 한 살 많은 1964년생이다. 만약 부모님이 제때 출생신고를 했다면, 지금의 박태종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던 중, 이모부가 한국마사회 마포 지점 근처 식당에 배달을 갔다가 우연히 ‘12기 기수후보생 모집’ 벽보를 보고 “체격도 맞으니 한번 응시해 보라”고 해서, 도전했지만 낙방했다. 서류심사와 신체검사, 체력시험까지 통과했는데 면접에서 떨어졌다.

“면접관이 경마란 무엇이냐고 묻기에 뚝섬 경마장 구경 갔을 때 ‘경마는 레저스포츠입니다’라는 홍보물을 봤던 기억이 나서 그렇게 대답했다. 면접관들이 비웃었다. ‘경마란 경주거리, 상금, 부담중량 등 정해진 조건하에서 2두 이상의 말을 달리게 하여 승부를 겨루는 경기에 관객이 돈을 걸어 즐기는 성인 레저’라고 대답했어야 했다.”

그는 오기가 생겨 13기 때 다시 도전해 1987년 정식 기수로 데뷔했다. 30년이 지나 한국경마의 레전드가 된 박태종 기수에게 경마란 무엇인가를 다시 물어봤다.

“외국에서 경마는 진짜 레저스포츠다. 우리나라도 예전보다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도박이라는 인식이 여전하다. 어쩌다가 배당 높은 걸 맞힐 수는 있지만 과욕은 절대 금물이다. 경마를 오래한 사람치고 돈 벌었다는 얘기를 들어보질 못했다. 그냥 야외에 놀러왔다 생각하고 재미로 조금씩 베팅하며 즐겼으면 좋겠다.”

돈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화제가 됐다. 잘나가는 경마 기수는 과연 한 해에 얼마나 벌까.

기수의 주된 수입은 상금인데, 5착(5위)까지만 주어진다. 그 상금의 배분은 매년 조정되는데, 2009년 당시 상금의 80%는 마주에게 돌아갔다. 나머지 20%에서 기수가 6.5%, 조교사가 6%를 갖고, 7.5%가 마필관리사들(10명이면 0.75%씩)의 몫이었다.

예를 들면, 박 기수의 2009년도 상금 총액은 48억 원이었다. 그중 기수 몫이 6.5%이기에 3억 원이 약간 넘지만 세금(개인사업자)과 각종 공제금을 뺀 실제 수령액은 2억 원 안팎이었다. 그런데 기수는 기승료(출전수당)를 받는다. 박 기수가 무려 654경주에 출전한 2009년의 경우 기승료(5만4000원) 수입만 3500만 원이 넘었다.

“몇 년 전 기승료가 7만 원으로 올랐다. 예전에 기승료는 신경도 안 썼는데 요즘은 무척 소중하다. 전성기가 지난 기수에게는 마주나 조교사가 능력 있는 말을 탈 기회를 잘 주지 않아 상금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고 하던데, 경마는 마칠기삼(馬七騎三)이다. 한창 잘나갈 땐 말을 골라서 탔는데….(웃음)”

오늘날의 박태종을 만든 일등공신은 아내 이은주 씨(44)다. 기초승마교관 출신인 이 씨는 박 기수의 전담 매니저이자 조교사나 다름없다. 상대방이 먼저 말을 걸어야 겨우 입을 여는 과묵한 성격인 박 기수는 아내 얘기가 나오자 표정이 밝아지며 스스로 말을 이어갔다.

“1998년 승마용품 회사를 운영하는 팬의 소개로 맞선을 봤는데, 첫눈에 반했다. 만난 지 6개월 만에 결혼했다. 당시 아내가 강원도 양구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매주 왕복 10시간이 넘는 거리를 운전해서 만나러 갔다. 나보다 키가 한 뼘은 더 크다(163cm).”

무려 2000번도 넘게 결승선을 1착으로 들어왔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우승을 꼽는다면?

“1999년 코리안더비(대상 경주)에서 ‘만석꾼’과 일궈낸 우승이다. 당시 강력한 우승후보는 ‘자당’이었다. 출전마 중 어떤 말도 자당을 이길 수 없다고 예상했지만 결승선을 100m 앞두고 치고 나가 역전승했다. 그날은 딸의 백일이자, 아내가 딸을 안고 처음으로 경마장을 찾은 날이었다.”

말을 30년 이상 탔지만 박 기수가 말과 교감하는 방식은 그의 성격 탓인지 무덤덤하다. 경주나 조교를 마친 뒤 말 목덜미를 ‘툭툭’ 두 번 쳐주는 게 전부란다. 우승을 했어도, 꼴찌를 했어도 마찬가지다. 사람한테나 말한테나 공평하게 무뚝뚝하다.

“말은 덩치만 컸지 엄청 겁쟁이다. 참새만 봐도 놀란다. 말의 성격은 눈을 보면 대충 알 수 있지만 타 봐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말도 기승자가 초보자인지 베테랑인지 금방 알아차린다.”

눈이 얼굴의 정면에 있는 사람의 시야는 180도지만, 눈이 옆에 위치한 말의 시야는 거의 360도에 가깝다. 게다가 오른쪽과 왼쪽 눈이 서로 다른 물체를 동시에 볼 수 있다. 이렇게 눈의 성능이 뛰어난 말의 심리를 안정시키기 위해 경주마는 눈가리개를 하는 경우가 많다.

“눈가리개를 씌워도 말이 똑바로만 달리는 것은 아니다. 점점 한쪽으로 치우쳐서 달리는 말이 있다. 그래서 경주 중 진로 방해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때 기수가 말에 채찍질을 해 방향을 바로잡는다. 자칫하면 본인도 생명을 잃을 수 있는 큰 사고가 나는데 고의로 진로를 방해하는 기수는 없다. 채찍은 결승선을 앞두고 가속할 때뿐만 아니라 주행 방향을 제어할 때도 필요하다.”

무척 민감하다는 측면에서 박 기수는 말과 닮았다. 작은 인기척에도 깨기 때문에 부부가 따로 잠을 잔다. 물론 집에 유선전화는 없다. 휴대전화도 아예 전원을 끄고 잔다. 딸이 애완동물을 무척 좋아하지만 강아지나 고양이를 키우지 못하게 했다. 그 딸이 올해 대학에 진학했는데, 전공이 동물학이다.

박 기수의 롱런 비결은 동료 선후배들도 혀를 내두르는 철저한 자기 관리다. 그보다 나이가 많은 기수는 김귀배 기수(55)뿐이다.

술, 담배를 전혀 하지 않는 박 기수는 휴일인 화요일을 제외하곤 매일 새벽 4시 반에 일어난다. 경마장으로 5시 반까지 출근해 말 서너 마리의 새벽 조교를 한다. 오전, 오후 두 차례 웨이트트레이닝을 거르지 않는다. 쉬는 날에도 반드시 밤 9시 이전에 잠자리에 든다. 거의 30년간 이렇게 생활해 왔다. 주변 사람들이 그를 ‘칸트’라 부를 정도다.

스트레스도 운동으로 푼다. 무릎을 다치기 전에는 등산을 자주 갔는데 요즘은 자전거를 많이 타고 골프도 가끔 친다. 홀인원도 두 차례 기록했다는 박 기수는 장타자는 아니지만 수준급 골퍼다. 최근엔 아내와 드라이브도 할 겸 맛집을 즐겨 찾는다.

“동료 선후배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것은 내 체질이다. 체중 관리가 고역인 경마 기수로서는 천운을 타고났다. 먹고 싶은 거 다 먹어도 살이 안 찐다. 오히려 살을 찌우려고 노력 중이다. 그렇지 않으면 마필 부담중량을 맞추기 위해 말에 패드를 얹어야 한다. 그런데 패드는 말이 제 능력을 발휘하는 데 지장을 준다. 경주 중 빠지면 실격되기에 꽉 조여 매기 때문이다. 말에게는 기수 체중 1kg보다 패드 1kg이 훨씬 큰 부담이다.”

또 하나의 롱런 비결은 단 한 번도 경마 부정에 연루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유혹’은 몇 번 받았지만 크게 고민하지 않고 거절했단다.

“낙마사고로 크게 다칠 때마다 기수생활을 그만두고 싶다. 하지만 완쾌되면 또 말을 타고 싶어진다. 아내가 ‘보험’으로 생각하라며 권유해 조교사 면허는 이미 따 놨다. 하지만 조교사는 내 적성에 안 맞는 것 같다. 체력이 허락하는 한 계속 기수를 하고 싶다.”

기수 정년 60세까지 경주로를 달리고 싶다는 박태종 기수. ‘작은 거인’의 힘찬 질주는 현재 진행형이다.
 

▼경마기수 되려면▼
 
강철같은 근력 필수… 유연성-순발력 중요

 
렛츠런파크 서울(과천경마장)에서 포즈를 취한 박태종 기수. 채찍을 살짝 쥔 채 팔짱을 꼈건만, 그의 팔뚝 근육은 잘 발달된 경주마의 근육을 연상케 한다.
렛츠런파크 서울(과천경마장)에서 포즈를 취한 박태종 기수. 채찍을 살짝 쥔 채 팔짱을 꼈건만, 그의 팔뚝 근육은 잘 발달된 경주마의 근육을 연상케 한다.
경마기수는 키가 크면 불리한 직업이다. 박태종이 기수후보생으로 합격한 1986년 당시 응시자격 중 신체조건은 ‘키 160cm 이하, 체중 48kg 이하, 시력 1.0 이상, 색맹이 아닌 사람’이었다.

병역면제 판정을 받은 박태종 기수의 공식 프로필에는 키 150cm, 체중 48kg으로 적혀 있다. 키가 가장 컸을 때와 몸무게가 가장 많이 나갔을 때 치수를 30년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척추가 두 번이나 부러진 박 기수의 최근 키는 148cm, 체중 46kg이다.

기수 응시 자격 기준(남녀 동일)은 신세대의 몸집이 커진 것 등을 반영해 ‘키 168cm 이하, 체중 49kg 이하, 시력 0.3 이상(맨눈 기준), 난청 및 색맹이 아닌 사람’으로 완화됐다.

이런 신체조건에 뛰어난 근력과 순발력, 유연성, 평형감을 겸비해야 한다. 자신보다 10배 이상 무거운 경주마(평균 450∼500kg)를 제어하면서 시속 60km 이상으로 질주하려면 강인한 체력이 필요하다. 또한 경마는 베팅 스포츠이기에 도덕성은 기수가 갖춰야 할 기본 덕목이다. 1999년부터는 여성 기수도 선발하고 있다.

올림픽 종목 중 유일하게 남녀 구분 없이 메달을 다투는 승마(마장마술, 장애물비월)와 마찬가지로 경마도 성(性) 대결 스포츠다. 배우 임수정이 여성 기수로 주연한 영화 ‘각설탕’의 감동을 잊지 못하는 영화 팬들도 있을 것이다.

기수후보생으로 경주마의 주종인 서러브레드(4년) 또는 제주조랑말(1년) 교육과정을 마치면 기수 면허를 취득하게 된다. 경마기수는 개인사업자다. 박태종 같은 프리(free) 기수와 소속조 기수로 나뉘는데, 매년 5월 종합소득세를 내는 것은 마찬가지다.

기수의 소득 수준은 경주 성적에 따라 편차가 크다. 2014년 기준(기수 133명) 기수 1인당 월 평균 소득은 800만 원대였다. 이는 박태종 기수 데뷔 때와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다. 박 기수는 기수후보생 시절 월급은 1만2000원, 데뷔 직후 월평균 수입은 20만 원 정도였다.

안영식 전문기자 ysa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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