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금니 아빠’ 살인 미스터리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0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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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중생 딸 친구 살해-사체유기 혐의
딸 시켜 “만나자” 집안으로 유인… 부녀 범행 후 수면제 먹고 의식불명
시어머니 지인 ‘성폭행’ 고소한 부인, 9월 남편과 말다툼 뒤 투신
난치병 딸 병원비 모금활동 유명세… 실제론 집 2채-외제차 등 3대 보유
경찰 “집안에 음란기구 다수 발견”

거대 백악종(白堊腫)이라는 질환이 있다. 치아와 뼈 사이(백악질)에 악성 종양이 계속 자라는 병이다. 전 세계에서 수십 명만 앓는 것으로 알려진 희귀 난치병이다. 이모 씨(35)가 일반의 관심을 모은 계기가 바로 거대 백악종이다. 2006년 이 씨가 자신과 똑같은 병을 갖고 태어난 딸을 살리려 애쓰는 안타까운 모습이 일부 언론에 공개됐다. 당시 이 씨는 계속된 치료로 치아가 어금니 1개밖에 남지 않아 ‘어금니 아빠’로 불렸다. 그로부터 11년 후 이 씨는 여중생 딸의 친구를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혐의로 경찰에 붙잡혔다. 범행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 딸까지 범행에 동원한 ‘딸바보’ 아빠

7일 서울 중랑경찰서에 따르면 이 씨는 지난달 30일 중랑구 망우동 자택에서 딸 이모 양(14)의 친구 A 양(14)을 목 졸라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폐쇄회로(CC)TV에는 A 양이 같은 날 낮 12시 17분경 이 양과 함께 건물로 들어가는 장면이 찍혔다. A 양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 무렵 A 양은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친구가 놀러가자는데 가도 되느냐”고 말했다.

A 양이 집에 오지 않자 같은 날 오후 부모가 경찰에 신고했다. 수사에 착수한 경찰은 A 양이 사라진 전후 이 씨가 딸과 함께 강원 영월군을 오간 정황을 포착했다. 영월은 이 씨의 어머니가 사는 곳이다. 경찰은 이 씨가 1일 A 양 시신이 든 것으로 추정되는 검은색 대형 가방을 차량에 싣는 CCTV 화면과 이 씨 부녀가 탄 차량이 1일 영월 요금소를 지난 기록을 확보했다. 경찰은 이 씨 부녀가 1일 밤 강원 정선군의 한 모텔에서 숙박한 뒤 서울로 돌아온 것으로 보고 있다.

경찰은 이 씨가 A 양을 자택으로 오게 하기 위해 딸을 동원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양은 중학교 진학 이후 교류가 거의 없던 A 양에게 최근 돌연 “만나자”고 연락했다. A 양의 한 친구는 “이 양이 2년 만에 갑자기 연락해 만나자고 해 (A 양이) 당혹스러워 했는데 워낙 거절을 못하는 성격이라 따라 나섰다가 화를 당한 것 같다”며 “이 양이 다른 친구들에게도 만나자고 했는데 다 거절당한 걸로 안다”고 말했다.

이 양은 1일 ‘30일 오후 2시쯤 A랑 놀다가 헤어졌는데 그 이후 전화가 끊겼다. 가출한 것 같다’는 문자메시지를 친구에게 보냈다. 경찰은 이 씨가 알리바이를 위해 딸에게 거짓말을 종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씨는 영월에 가기 전 차량 블랙박스를 제거했다가 서울로 돌아와 다시 붙인 것으로 조사됐다. 인터넷에 ‘아내가 그리워 동해로 간다’는 취지의 글을 올리기도 했다.

이 씨 부녀는 5일 오전 10시 20분경 서울 도봉구의 한 빌라에 숨어 있다가 체포됐다. 두 사람 모두 수면제를 과다 복용해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간신히 의식을 되찾은 이 씨를 추궁한 경찰은 6일 오전 9시 A 양 시신을 찾았다. 이 씨 부녀는 생명엔 지장이 없으나 의식이 또렷하지 않아 경찰은 조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경찰이 확보한 이 씨 태블릿PC에는 2일 이 씨가 딸과 함께 찍은 영상이 담겨 있다. 영상에서 이 씨는 “자살을 마음먹고 영양제 안에 약을 넣어뒀는데 집에 놀러온 A 양이 모르고 먹었다”고 주장했다. 살인이 아닌 사고라는 의미다.

○ 이 씨 소유의 집 2채와 고급 차량 3대

경찰에 따르면 이 씨는 현재 서울에 집 2채, 독일산 외제차 2대와 국산 고급차 1대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과거 이 씨는 딸을 살리겠다며 미국까지 건너가 모금활동을 펼쳤다. 이 씨 자택에서는 음란기구도 여럿 발견됐다.

경찰은 이 씨가 부인 최모 씨(32)의 사망 이후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살인을 저지른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최 씨는 지난달 초 서울 중랑구 5층 자택에서 투신해 목숨을 끊었다. 경찰에 따르면 최 씨는 수년에 걸쳐 시어머니의 지인에게 지속적인 성폭행을 당했다고 최근 이 씨에게 털어놨다. 이후 최 씨는 영월경찰서에 가해자를 성폭행 혐의로 고소했다.

당시 이 씨는 최 씨에게 “증거를 확보해야 하니 (가해자와) 성관계를 가져라”고 종용했다고 한다. 이 문제로 부부가 심하게 다툰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최 씨가 투신하기 전 이 씨에게 폭행까지 당한 걸로 볼 때 이 씨가 최 씨의 자살을 방조했을 가능성을 두고 내사를 벌였다. 최 씨가 남긴 A4용지 4장 분량의 유서에는 최 씨가 어린 시절부터 가족 등 여러 사람에게 성적 학대를 당했다고 고백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이지훈 easyhoon@donga.com·김배중·신규진 기자

● 여중생 살인사건 일지

△9월 5일 피의자 이모 씨의 부인 최모 씨 자살
17·27일 이 씨, 최 씨 유골함·영정 영상 공개
30일 여중생 A 양 피살(추정)

△10월 1일 강원 영월군 야산에 시신 유기
5일 경찰, 서울 도봉구 빌라에서 이 씨 체포
6일 A 양 시신 발견
7일 이 씨(사체유기 혐의) 구속영장 신청
#어금니 아빠#살인#거대 백악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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