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 재밌는 역사]세종대왕은 반대파를 어떻게 설득했을까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9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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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 동아일보DB
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 동아일보DB
세종(재위 1418∼1450년)은 22세에 왕이 되어 32년 동안 조선을 이끌었습니다. 세종이 만약 20년 정도만 나라를 다스리고 돌아가셨다면 우리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선 한글이 가장 걱정됩니다. 우리가 가장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한글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한글을 창제한 시기는 세종 25년(1443년)이니까요.

○ 여론조사와 토론으로 반대 설득

오늘은 세종의 개인적인 삶과 의사소통에 대해 생각해 보려 합니다. 세종은 22세에 셋째 아들로 임금이 되었습니다. 세종이 즉위한 후에도 아버지 태종은 4년 동안 살아 정치에 관여했습니다. 또한 아버지의 신하이자 친구인 대신이 조정에 가득했습니다. 정치하기 참 힘들었을 겁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경남 사천 세종대왕 태실지 세종대왕(재위 1418∼1450년)의 태(胎)를 봉안한 태실이 있던 곳이다. 세종
대왕 태실은 정유재란(1597년) 때 왜적에 의해 도굴, 파손되어 선조 34년
(1601년)에 수리하였으며, 영조 9년(1733년)에는 태실비를 세우고 태실을
수리한 기록문서 ‘태실수의궤’를 남겼다. 그 후 일제강점기인 1929년에 태
실임야가 민간인에게 팔렸고, 태실은 경기 양주로 옮겨 갔다고 한다.
경남 사천 세종대왕 태실지 세종대왕(재위 1418∼1450년)의 태(胎)를 봉안한 태실이 있던 곳이다. 세종 대왕 태실은 정유재란(1597년) 때 왜적에 의해 도굴, 파손되어 선조 34년 (1601년)에 수리하였으며, 영조 9년(1733년)에는 태실비를 세우고 태실을 수리한 기록문서 ‘태실수의궤’를 남겼다. 그 후 일제강점기인 1929년에 태 실임야가 민간인에게 팔렸고, 태실은 경기 양주로 옮겨 갔다고 한다.
세종은 약 10년 동안 공손하고 겸손하게 자기를 낮췄습니다. 부족한 점을 솔직하게 말하고, 나라의 어려움을 자신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그러면서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습니다. 궁궐에 있는 책 중에서 읽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겸손하고 학문을 좋아했던 세종이 대신들과 어떻게 소통했을까요? 바로 ‘경연(經筵)’이었습니다. 경연은 왕과 신하가 함께 모여 국가의 정책과 학문을 토론하는 자리를 말합니다. 어떤 정책을 결정할 때, 세종은 경연에서 신하들의 의견을 들었습니다. 또한 자신이 알고 있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여러 사례들을 조목조목 들면서 설득했습니다. 공손함과 학문에 대한 사랑은 세종이 왕이 된 후 약 10년 동안 별 무리 없이 국정을 이끌어간 원동력이었습니다.

세종은 대신들의 의견뿐만 아니라 하급 관리 및 백성들의 의견도 최대한 많이 듣고 정책에 반영했습니다. 대표적인 제도가 공법(貢法)입니다. 공법은 일종의 토지에 대한 조세제도입니다. 땅의 주인은 토지의 좋고 나쁨과 풍년과 흉년에 따라 토지에 대한 세금을 나라에 바쳤습니다. ‘전분 6등법과 연분 9등법’이라고 부릅니다. 지금까지 연구한 자료에 의하면 세종은 15년 동안 공법을 연구하고, 약 17만 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고 합니다. 오랜 연구와 의견 수렴을 거쳐 공정한 조세제도를 만들고 시행한 것입니다. 세계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일입니다. 공정하고 좋은 제도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오늘날 정책을 담당하는 모든 사람이 깊이 새겨보아야 할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 국익 위할 땐 과감한 결단


훈민정음 해례본(간송미술관 소장) 정인지 등 집현전 학사들이 중심이 되어 세종 28년(1446년)에 만든 훈민정음의 한문해설서이다. 책이름을 글자 이름인 훈민정음과 똑같이 ‘훈민정음’
이라고도 하고, 해례가 붙어 있어서 ‘훈민정음 해례본’ 또는 ‘훈민정음 원본’이라고도 한다.
훈민정음 해례본(간송미술관 소장) 정인지 등 집현전 학사들이 중심이 되어 세종 28년(1446년)에 만든 훈민정음의 한문해설서이다. 책이름을 글자 이름인 훈민정음과 똑같이 ‘훈민정음’ 이라고도 하고, 해례가 붙어 있어서 ‘훈민정음 해례본’ 또는 ‘훈민정음 원본’이라고도 한다.
세종은 젊었을 때부터 여러 가지 질병이 있었다고 합니다. 특히 즉위한 지 20년이 지난 후부터 현대의 당뇨병 격인 소갈증과 그 합병증으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더군다나 즉위 25년을 전후하여 20세 정도의 두 아들 광평과 평원 대군이 숨졌고, 8명의 왕자와 2명의 공주를 낳은 왕비 소헌왕후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루하루가 정말 고통스러웠을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한글이 창제됩니다. 한글 창제는 어떤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는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창제과정 기록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비밀 프로젝트’였는지도 모릅니다.

갑자기 세종 28년(1446년)에 제작 사실을 알리고 있습니다. 조정의 신하 대부분이 한글창제와 반포를 결사적으로 반대했습니다. 최만리와 정창손의 반대 상소가 대표적입니다. 반대하는 신하들은 ‘언문을 만드는 것은 중국을 버리고 오랑캐와 같아지려는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당시의 양반과 관리들은 지식과 문화는 자기들만 소유하고, 일반 백성에겐 필요 없거나 무익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이 가진 최고의 특권을 일반 백성과 공유하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반대가 심했겠습니까.

여러분이라면 이때 어떤 결정을 내릴까요? 세종은 많은 신하들 의견을 따르지 않고, 독단적으로 한글을 반포합니다. 그리고 한글의 편리한 사용을 위해 용비어천가 10권, 훈민정음, 동국정운 등의 책을 완성합니다. 진정한 스승과 리더는 중요하고 옳은 일이라고 확신한다면, 반대를 무릅쓰고라도 그 일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세종이 바로 그런 분이었습니다. 한글이 있었기에 우리들은 함께 지식과 문화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국민의 지식과 교육 수준이 높은 나라에서 서로 경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세종대왕이 태어난 5월 15일을 스승의 날로 정하지 않았을까요?

오늘 세종의 개인사와 의사소통에 대한 글을 잘 읽어보았다면, 친구들에게 신문기사를 보여 주고 한 번 토론해 보세요. 오늘 우리나라에서 많은 사람의 의견을 듣고, 오랜 시간을 연구하면서 추진해야 할 국가적 사업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야기해 보세요. 많은 사람이 반대하지만 나라와 국민을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할 국가적 과제는 무엇일까요? 어렵다면 범위를 좁혀 보세요. 우리 반 친구들이 대부분 싫어하고 반대하지만, 꼭 해야만 하는 일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그리고 그 이유들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토론해 보세요.
 
이환병 서울 용산고 교사
#세종대왕#훈민정음#세종대왕의 설득력#세종대왕의 의사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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