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잡史]변방 장교 가사도우미 ‘방직기’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9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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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낮부터 감기를 앓기 시작해서 크게 아팠다. … 월매가 내내 병구완을 해주었다. 월매와 함께 이야기할 때마다 항상 눈물이 흘렀다. 의향의 어머니도 병구완을 하러 왔다.”(부북일기·赴北日記 1645년 4월 3일)

조선에서 무과에 합격한 군관은 1년 동안 의무적으로 최전방인 함경도 등지에서 복무했다. 이른바 출신군관(出身軍官)이라고 부르는 장교다. 출신군관들은 토착민으로 이루어진 토착군관보다 높은 대우를 받았다.

출신군관들은 이미 가정을 이뤘어도 가족을 임지로 데려갈 수 없었다. 주거와 식사부터 군복의 세탁과 수선에 이르는 다양한 생활의 어려움도 따랐다.

병이라도 앓게 되면 어디에 몸을 맡겨야 할지 난감한 일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타 지역에서 온 군관에게는 방직기(房直妓)를 배정해 방직기의 집에서 숙식을 하며 여러 도움을 받도록 했다. 이 역할을 기생이 맡을 경우 방직기, 여자 종이 맡을 경우 방직비(房直婢)라고 불렀다. 이들은 일종의 당번병이자 가사도우미와 같은 역할을 담당했다.

선조에서 인조대 사이를 살았던 박계숙, 박취문 부자는 함경도 회령에서 군관으로 생활한 경험을 ‘부북일기’로 남겼다. 이 자료를 보면 방직기는 군관의 식사와 빨래 등 모든 생활을 담당했다.

방직기의 어머니도 땔나무나 반찬, 간혹 술이나 안주 등을 제공하며 정성을 다해 대접했다. 군관이 병에 걸려 아플 때는 치료하기 위한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 방직기는 장교 숙소 제공에서 취사·보급·정비·간호 등 다양한 업무를 처리해 준 군 생활의 단짝이었다.

군관들은 활쏘기 시합을 자주 열어 실력을 연마했다. 1년 동안 120일 넘게 시합을 했으니 공무로 바쁠 때 외에는 거의 활을 쏘며 시간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군관들은 자신의 방직기와 짝을 지어 시합을 열기도 했는데 시합에서 승리하면 상으로 받는 쌀과 콩 같은 곡물이나 옷감, 종이 등이 방직기의 차지가 되곤 했다.

방직기와 군관의 관계는 군관의 임기와 함께 끝났다. 방직기는 해당 군현에 소속돼 있었기에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거나 개인의 첩이 되는 건 불법이었다.

그럼에도 군관과 방직기가 뜨거운 사랑에 빠지는 일이 종종 있었다.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1539∼1583)은 1573년 병마절도사의 보좌관인 북도평사에 부임한다. 이때 방직기를 맡은 홍랑과 한눈에 사랑에 빠져 아들을 낳기도 했다. 이들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전한다.

김동건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수료
#방직기#부북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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