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세상/최지훈]한 친구가 단톡방을 나갔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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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보근 기자 paran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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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훈 호호스프 대표
최지훈 호호스프 대표
어릴 때 읽었던 전래동화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외아들을 둔 어느 부자가 있었다. 부자는 아들의 친구 사귐이 가벼워 보여 걱정이 됐다. 그는 돼지를 잡아 지게에 올리고 사람을 죽였다며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해보라 시킨다. 많다고 자랑하던 아들의 친구들은 하나같이 문을 걸어 잠그고 아들을 외면한다. 이에 아버지는 본인의 친구 집으로 찾아가기로 한다. 아버지의 친구를 만나 상황 설명을 하니 그는 선뜻 문을 열어준다. 이어 함께 걱정하며 자수를 권한다. 자초지종이 밝혀진 뒤 아버지와 친구는 돼지를 안주 삼아 술자리를 만들고 아들은 깨달음을 얻는다.

“친구 아이가!”

영화 ‘친구’의 대사다. 영화는 나의 청소년기와 맞물려 깊은 울림이 됐다. 친구라면 모든 게 용인되던 시절이다. 친구는 믿음직했고 사랑스러웠다. 돈도 가족도 심지어 종교도 친구 따라 흔들렸다. 친구와의 의리는 삶의 목표였다. 죽은 돼지를 지게에 싣고 와 친구 집 대문을 두드릴 때 밖에 선 친구를 서슴없이 안으로 들이는 전래동화 속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린 내가 바라던 관계는 그런 우정이었다.

‘한국인의 정’이라는 말이 오지랖으로 치환되고 있다. 농경사회의 단체노동을 배경으로 한 문화에서, 산업사회의 개별노동 중심적 문화로 변하는 과정인 듯하다. 우정의 의미도 시간의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나 보다.

친구 관계 유지는 결코 쉽지 않다. 정도 오고 가는 맛이 필요하다. 베푸는 자는 섭섭하고, 받는 자는 모르기 마련이다. 서로가 가까울수록 작은 흠도 선명히 보이는 법이다. 사이를 돈독히 하기 위해 활짝 열어 보인 속내는 돌아서면 치명적 약점이다. 지피지기한 둘의 싸움은 승자가 없다. 상처만 남을 뿐이다. 각자의 길에서 달리기 시작하면서였다. 친구라는 개념은 장막이 걷히듯 새로운 배경을 맞이했다. 서른 전후였다. 가끔 생각나지만 현실에서 만나기는 어려운 게 친구가 됐다. 경조사에서 종종 얼굴을 보는 게 다였다. 나이가 차오르니 경우와 체면을 보는 눈도 생겼다. 친구 사이에도 예의가 신경 쓰인다. 돼지를 메고 와 친구를 시험하던 전래동화의 주인공은 천하에 경우 없는 사람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얼마 전 한 친구가 단톡방을 나갔다. 15년 지기 친구의 말없는 일탈은 남은 친구들에게 걱정과 섭섭함을 남겼다. 하지만 아무도 성큼 그에게 달려가진 않았다. 우정을 빙자한 오지랖이 될까 봐 그런 것이다. 세상이 변한 걸 우린 모두 알고 있었다. 15년 전이라면 당장 전화하고 집으로 찾아가 무슨 일이냐며 캐묻고 얼러 데리고 나와 억지로 술을 먹였을 일이다. 단체의 힘으로, 우정이란 기치 아래 친구의 감정을 비벼 없앴을 것이다. 그래야 친구였다. 친구를 혼자 두는 일은 없었다. 우정은 민폐를 가리고 있었다.

혼밥 혼술이 유행이다. 친구를 혼자 두는 게 과거에 비해 자연스러워진 모양이다. 혼자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 개인의 공간을 확보해주는 사회적 시선이 생기고 있다는 말이다. 좋은 일이다. 여태껏 너무 가까이 붙어 있었다. 친구라고 모든 것을 공유할 필요는 없다. 적당한 거리가 오히려 관계를 돈독히 해준다. 다소 늦은 깨달음이다.

실없는 소리로 하루를 채워도 즐겁던 날이 그립다. 함께라는 의미가 다였던 순수함이 어렴풋하다. 각자 부여받은 삶의 과제를 마치고 나면 다시 모일 수 있으리라 믿고 있다. 굽이쳐 흐르는 계곡물도 넘치는 폭포수도 바다에서 조용히 모이듯 말이다.
 
최지훈 호호스프 대표
#영화 친구#혼밥#혼술#우정#적당한 거리#친구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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