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이헌재]‘바람의 아들’이 아들을 키우는 법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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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재 스포츠부 기자
이헌재 스포츠부 기자
안타를 치고 1루로 나간다. 2루와 3루를 연달아 훔친다. 후속 타자의 땅볼 타구 때 홈으로 파고들어 득점을 올린다. 전성기 시절 이종범(47·MBC스포츠 해설위원)은 그런 선수였다. 호리호리한 체격이었지만 홈런도 곧잘 쳤다. 심판의 “플레이볼” 콜이 떨어지기 무섭게 홈런을 치곤 했다.

1998년 일본 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건스에 진출해 현란한 플레이를 선보였을 때 한 일본 신문은 이렇게 썼다. “‘바람의 아들’이 잠든 용(드래건스)을 깨웠다.” 한신 투수 가와지리 데쓰오가 던진 공에 맞아 오른쪽 팔꿈치가 부러지지만 않았어도 일본에서 좋은 활약을 이어갔을 것이다.

요즘 KBO리그는 이종범의 아들, 즉 ‘바람의 손자’ 이정후(19·넥센) 열풍으로 뜨겁다. 휘문고를 졸업하고 올해 프로에 입단한 그는 7월 말 현재 팀이 치른 98경기에 모두 출전해 타율 0.334(362타수 121안타), 2홈런, 34타점을 기록 중이다. 빠른 발을 이용해 17개의 2루타와 7개의 3루타를 쳤다. 후보로 시즌을 맞을 게 유력했지만 어느덧 넥센의 톱타자 자리를 꿰찼다. 아버지처럼 강한 어깨도 갖췄다. 지금 추세라면 이종범도 해보지 못한 신인왕을 수상할 게 유력하다.

이런 아들을 둔 아버지는 얼마나 자랑스러울까. 하지만 이종범은 아들 얘기만 나오면 손사래부터 친다. “제발 조용히 지켜만 봐 줬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야구 천재’였던 이종범은 타격과 수비, 주루 등 모든 분야에서 국내 최고의 전문가다. 하지만 아들에게는 일절 야구 얘기를 하지 않는다. 그는 “팀에는 감독이 있고, 코치가 있다. 선배들도 좋은 말을 해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무슨 말을 하겠나”라고 했다.

다만 강조하는 것은 선수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자세와 태도다. “야구 좀 한다고 우쭐대면 안 된다” “항상 겸손하고, 행동 조심해야 한다” “선배들에게 예의를 갖춰야 한다” 등등. 어찌 보면 뻔한 말들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얘기한다.

이정후는 좋은 교육을 받은 것 같다. 그에게서 ‘국민타자’ 이승엽(41·삼성)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이승엽은 최고의 스타이면서도 가장 겸손한 선수로 꼽힌다. 신인 때부터 지금까지 야구가 잘될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항상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자세를 보였다. 둘은 자칫 불편할 수 있는 언론 인터뷰에도 성심성의껏 임하는 모습도 닮았다. 김용희 전 SK 감독은 “야구만 잘하는 선수는 그냥 스타다. 실력에 인성까지 갖춰야만 ‘슈퍼스타’의 자격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 점에서 7월 15일 대구에서 열린 올스타전은 ‘슈퍼스타’의 이·취임식 같은 느낌이었다. 올해를 마지막으로 은퇴하는 이승엽과, 신인 이정후가 한 무대에 선 것이다. 이승엽은 “야구 2세들이 성공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데 좋은 본보기가 된 것 같다. 아버지보다 더 잘하는 선수로 성장했으면 좋겠다”고 덕담을 건넸다.

이정후는 이승엽처럼 슈퍼스타가 될 자질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오늘도 야구장으로 가는 이정후를 향해 아버지는 이렇게 소리친다. “감독님, 코치님 말씀 잘 들어라. 선배들한테 인사 잘하고∼.”

이헌재 스포츠부 기자 u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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