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동정민]공약의 덫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7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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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민 파리 특파원
동정민 파리 특파원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으로서는 답답해 미칠 노릇일 테다.

대통령 취임 두 달 반 만에 지지율 20%를 까먹었다. 정확히 말하면 최근 한 달 만의 일이다. 이렇다 할 부패 스캔들도 없었고, 큰 말실수를 한 적도 없다. 그런 그의 발목을 잡은 건 다름 아닌 자신의 공약이었다.

은행가 출신의 마크롱 대통령은 대선 때 감세를 공약했다. 기업 법인세와 국민 거주세를 줄여 투자와 소비를 진작시키겠다는 계획이었다. 이달 초만 해도 글로벌 금융기관 HSBC 최고경영자가 “마크롱 취임 이후 신호가 긍정적”이라며 런던 일자리 1000개를 파리로 옮기겠다고 선언할 정도로 분위기가 좋았다.

스텝이 꼬이기 시작한 건 지난달 말 프랑스 감사원의 발표부터다.

전임 프랑수아 올랑드 정부가 올해 재정적자 규모를 잘못 예상해 돈을 왕창 쓰고 임기를 마치는 바람에 재정적자가 유럽연합(EU) 상한선인 국내총생산(GDP)의 3%를 훌쩍 넘길 것이라는 경고였다.

올랑드 정부의 GDP 2.8% 적자 예상 규모만 믿고 감세 공약을 세웠던 마크롱 정부는 갑작스레 80억 유로(약 10조4800억 원)의 재정 구멍을 메워야 하게 생겼다.

당장 우파 공화당에서 영입한 에두아르 필리프 총리는 감세 공약을 1년만 미루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대선 공약을 만들었던 공신들이 “왜 마음대로 공약을 파기하느냐”며 총리를 공격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공신들의 손을 들었다.

결국 감세를 그대로 추진하는 대신에 부처 예산을 깎았다. 공공 소비를 줄이겠다는 공약과도 맞는 방향이었다. 그러나 치밀한 준비 없이 각 부서의 예산을 일률적으로 깎자 곳곳에서 잡음이 터져 나왔다. 연구 예산을 깎자 대학교수가, 지방 예산을 깎자 지자체가, 주택 보조금을 깎자 학생이 반발했다.

마크롱 대통령의 공약 중에는 국방예산을 GDP의 2%, 개발원조 예산을 GDP의 0.55%까지 올리겠다는 내용도 있었다. 관련 분야 예산 삭감은 또다시 공약 파기 논란을 불렀다. 모든 게 엉켜버린 상황이 벌어졌다.

공약을 지키자니 현실이 바뀌었고, 그래서 다시 조정하자니 파기 논란이 일고, 그대로 지키자니 다른 공약과 충돌이 생기는 ‘공약의 덫’에 걸린 것이다. 전임 정부가 계산을 잘못 한 탓이라고 소리쳐봤자 변명처럼 들릴 뿐이었다.

공약을 지켜야 하는가? 그렇다. 공약은 지켜야 할 유권자와의 약속이다. 그럼 무조건 지켜야 하는가? 꼭 그렇지는 않다. 공약은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다. 후보 시절에는 정보가 제한적이고 취임 후 국내외 환경도 계속 바뀐다. 그 속에서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하는 게 대통령의 몫이다. ‘공약의 덫’은 정해진 답이 없기에 강력하다.

어느 대통령이든 그 덫을 피할 수는 없다. 결국 어떻게 벗어나느냐가 중요하다.

마크롱 대통령은 윽박지르거나 현실을 외면했다. “갑작스러운 국방 예산 삭감은 곤란하다”는 군 수뇌부의 반발을 “나는 당신의 상관”이라며 한마디로 묵살했다. 긴축 정책에 대한 국민 반발엔 “일시적 고통이니 참아 달라”는 대변인의 말로 어물쩍 넘어가려 했다. 결과는 “이미지 정치만 한다”는 국민들의 강력한 비난과 지지율 급락이었다.

귀찮고 힘들어도 피해 갈 방법이 없다. 대통령은 이 공약을 왜 지금 지켜야 하는지, 다른 공약은 왜 지킬 수 없는지를 정치권과 국민에게 늘 설명하고 이해를 구해야 한다. 야당도 입맛에 맞는 공약은 “왜 안 지키냐”고, 입맛에 맞지 않는 공약은 “왜 섣불리 추진하느냐”고 일차원적 비판을 하기 전에 함께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아 초래되는 사태의 피해는 결국 국민에게 돌아간다.
 
동정민 파리 특파원 ditto@donga.com
#마크롱 대통령#공약의 덫#마크롱 이미지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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