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 특파원의 글로벌 이슈&]트럼프의 달걀, 문재인의 베이컨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7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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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 특파원
박용 특파원
사업가 출신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자유’ ‘정의’ ‘정직’과 같은 정치인의 ‘착한 단어’를 자주 쓰진 않는다. 그가 좋아하는 말은 따로 있다.

“우리 상품에 100% 관세를 붙이는 국가들이 있다. 우리는 그 나라 물건들이 들어올 때 관세를 물리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걸 자유무역이라고 한다. 아니다. 그건 멍청한 무역(stupid trade)이다.”

17일(현지 시간)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제조업과 근로자를 치켜세우기 위한 ‘메이드 인 아메리카 위크’ 첫날 연설에서 “내가 좋아하는 단어가 ‘reciprocity’”라며 이같이 말했다. 청중 사이에선 박수가 터져 나왔다. 상호주의나 호혜(互惠)라고 번역할 수 있는 ‘reciprocity’의 사전적 정의는 “국가나 조직끼리 부여되는 특권과 같이 서로에게 득이 되는 일을 위해 다른 사람과 뭔가를 주고받는 행위”다.

트럼프 대통령이 멍청한 무역이라고 싸잡아 비판하는 자유무역협정(FTA) 중엔 한미 FTA도 포함돼 있다. 미 무역대표부(USTR)는 트럼프 대통령의 뜻이라며 다음 달 한미 FTA 개정 협상을 위한 공동위원회 특별세션을 시작하자고 서한까지 보냈다.

상호주의 관점에서 한미 FTA는 트럼프 대통령이 주장하는 것처럼 ‘끔찍한(horrible)’ 협상은 아니다. 한미 FTA 이후 양국 교역(2016년 기준)은 160억 달러(12.4%), 양국 간 투자(2015년 기준)는 260억 달러(54.2%) 증가했다. 서로 더 중요한 교역 파트너가 됐으며, 한미 동맹의 양대 축인 경제협력은 더 굳건해졌다.

미국의 무역적자가 크니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은 상호주의 관점에서 풀어야 할 문제는 아니다. 무역적자는 소비와 투자의 거시경제 관점에서 이해하는 게 옳다는 게 주류 경제학자들의 주장이다. 한국에서 자동차를 많이 사와 적자를 봤다면, 다른 나라들과의 교역에선 자동차 적자가 그만큼 줄어드는 게 무역의 이치다. 특정 국가와의 교역만 떼어내 적자를 줄여보겠다는 계산은 상호주의가 아닌 일방적 요구로 흐를 가능성이 높다.

무역장벽이 미국 제품의 수출을 막아 적자를 키운다는 시각도 그다지 과학적인 얘긴 아니다. 무역적자의 원인이 무역장벽이나 관세 때문이라는 학계의 연구는 드물다. 무역적자를 줄이려면 산업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게 더 효과적이라는 연구 결과는 차고 넘친다. 통화가치를 떨어뜨려 수출을 늘릴 수는 있으나, 대기업 개혁을 주장하는 문재인 정부는 수입 물가를 올려 서민을 희생시키고 수출 기업에 도움을 주는 고환율 정책엔 관심이 없으니 걱정할 일도 아니다.

국내총생산(GDP)에서 제조업 비중이 큰 한국과 GDP에서 서비스 비중이 압도적인 미국은 각자 잘하는 분야가 다르다. 한국은 상품수지 흑자가 클 수밖에 없고, 미국은 서비스수지 흑자가 큰 경제 구조다. 이런 건 눈감고 철강 자동차 적자만 따지면 자기 말만 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기 딱 좋다.

상부상조의 두레와 품앗이 문화가 있는 한국인은 제 주머니만 챙기는 야박한 사람들이 아니다. 지난해 농림축산물 분야 대미 무역적자는 61억3600만 달러에 이른다. 인구가 25배나 되는 중국보다 미국산 쇠고기를 더 많이 사먹는 게 한국인이다. 현대자동차와 삼성전자 LG전자는 모국엔 생산라인을 짓지 않지만 미국에는 공장을 짓고 투자도 많이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미 FTA가 미국 일자리 10만 개를 없앴다고 주장하지만, 한국 기업들이 미국에 투자해 4만5000개의 일자리를 만들었다는 얘긴 하지 않는다. 미국 기업은 한국 투자에 야박하다.

켄 블랜차드의 책 ‘겅호’에는 이런 얘기가 나온다. 어느 날 닭이 돼지에게 함께 힘을 모아 맛있는 식사를 준비하자고 제안했다. 닭은 돼지에게 달걀을 내어줄 테니 베이컨을 달라고 했다. 각자 하나씩 내놓자는 닭의 제안에 돼지는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닭의 기여와 돼지의 헌신은 전혀 다른 것이다.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미국과의 통상 확대에 정치적 생명까지 걸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지지층이 등을 돌릴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한미 FTA를 밀어붙였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로 정권 초부터 힘을 잃기도 했다. 그런 한국에 더 큰 살을 베어달라고 큰 접시를 들이대는 건 상호주의의 예의가 아니다.
 
박용 특파원 parky@donga.com
#메이드 인 아메리카 위크#한미 fta#상호주의#닭의 기여와 돼지의 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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