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名문장]내가 누구인지, 삶의 흔적으로 말할 뿐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7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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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아 최인아책방 대표 전 제일기획 부사장
최인아 최인아책방 대표 전 제일기획 부사장
‘중요한 문제들은 결국 언제나 전 생애로 대답한다네.’
―산도르 마라이, ‘열정’
 

산다는 것은 부정의 연속인 것 같다. 이건가 싶으면 아닌 것들이 나타나고 알아차렸나 싶으면 여전히 제자리다. 모를 뿐, 오직 모를 뿐이라는 말이 내 입에서 절로 나온다. 자신과 시간을 많이 보내고, 시선도 바깥을 쫓기보다 내면으로 향하는 편이지만 내가 모르는 내가 계속 튀어나온다. 내가 늘 나를 실망시키고 배신하고 놀라게 한다. 이래서 우리는 죽을 때까지 애쓰고 구해야 하는 걸까.

이 지점에서 산도르 마라이의 문장이 떠오른다. ‘중요한 질문은 결국 언제나 전 생애로 대답한다네’라는. 헝가리 태생의 작가, 산도르 마라이의 소설 ‘열정’ 속 주인공의 말이다.

주인공 헨릭은 아내와 친구 콘라드가 부정을 저지른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헨릭은 그 즉시 대응하지 않는다. 못 견딘 아내는 자살하고 친구는 도주한다. 헨릭은 41년을 은둔자처럼 산다. 그렇게 헨릭도 콘라드도 인생을 다 살아 노년이 된 어느 날 그 둘은 마침내 마주 앉고, 헨릭은 일생 동안 품었던 말들을 폭포수처럼 하룻밤에 쏟아낸다. 그것이 이 소설 ‘열정’이다. 중요한 질문은 전 생애로 대답해야 한다는 말을 하기 위해 그야말로 전 생애를 바쳐 기다렸던 것일까. 친구 콘라드도 전 생애를 바쳐 대답하도록? 헨릭은 이어서 말한다.

‘다 지나간 지금, 자네는 사실 삶으로 대답했네. 중요한 문제들은 결국 언제나 전 생애로 대답한다네. 그동안에 무슨 말을 하고, 어떤 원칙이나 말을 내세워 변명하고, 그런 것들이 과연 중요할까? 결국 모든 것의 끝에 가면, 세상이 끈질기게 던지는 질문에 전 생애로 대답하는 법이네. 너는 누구냐? 너는 진정 무엇을 원했느냐? 너는 진정 무엇을 할 수 있었느냐? 너는 어디에서 신의를 지켰고, 어디에서 신의를 지키지 않았느냐? 너는 어디에서 용감했고, 어디에서 비겁했느냐? 세상은 이런 질문들을 던지지.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누구나 대답을 한다네. 솔직하고 안 하고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결국 전 생애로 대답한다는 것일세.’

우리의 생각과 말, 혹은 우리가 먹는 것, 읽는 것, 사는 것들도 잠깐씩, 부분적으로는 우리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말해준다. 그러나 인간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이 될 뿐이라고 할 때 우리가 누군지 가장 믿음직하게 말해주는 것은 아마도 우리가 살아낸 삶, 인생 그 자체일 것이다. 말은 때때로 위대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삶 앞에서 말은 무력하고 왜소하다. 진실은 말이 아니라 삶에 있는 법이니까. 그러니 내가 어떤 인간인지, 누군지 하는 질문엔 말로 답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살아 낸 흔적으로 말할 뿐.

반생을 훌쩍 넘긴 이즈음 산도르 마라이의 이 문장이 벼락같이 떠오르더니 다시 확인하는 순간 머리카락이 쭈뼛 선다. 잘 살아야겠다!

최인아 최인아책방 대표 전 제일기획 부사장
#산도르 마라이#열정#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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