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생 자리에 넥타이족-취준생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7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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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시험 폐지 이후 달라진 신림동 고시촌 풍경

11일 서울 관악구 대학동에서 한 고시원을 원룸 건물로 리모델링하는 공사가 한창이다. 사법시험이 폐지되면서 고시생이 빠져나간 
‘신림동 고시촌’에 원룸을 선호하는 직장인과 취업준비생, 외국인 등이 몰리고 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11일 서울 관악구 대학동에서 한 고시원을 원룸 건물로 리모델링하는 공사가 한창이다. 사법시험이 폐지되면서 고시생이 빠져나간 ‘신림동 고시촌’에 원룸을 선호하는 직장인과 취업준비생, 외국인 등이 몰리고 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14일 이른바 ‘신림동 고시촌’으로 알려진 서울 관악구 서림동 원룸촌의 한 마을버스 정류장. 오후 6시를 넘기자 녹색 마을버스에서 내리는 사람 중에는 양복 차림의 젊은 직장인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회사원 김지남 씨(25)는 “다른 곳보다 월세가 싼 데다 직장과도 가까워 2년 전 이사했다. 이름만 고시촌이지 이곳에 거주하는 나 같은 직장인이 아주 많다”고 말했다.

지난달 24일 사법시험이 폐지되면서 서울 신림 고시촌의 풍경이 더 빠르게 바뀌고 있다. 사법시험생이 떠난 자리를 직장인과 일반 취업준비생, 외국인 등이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 고시촌 주인이 바뀌었다

김승국 씨(23)는 경찰 간부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지난해 이 고시촌으로 이사했다. 번화가와 맞닿은 노량진 학원가보다 조용한 데다 원룸 월세도 저렴했다. 김 씨는 현재 고시촌에 있는 경찰 시험 준비 학원을 다니고 있다. 그는 “고시촌에 살면서 경찰 시험이나 9급, 7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이 많아 학원 강의실은 늘 만원”이라고 말했다.

공시족뿐만 아니라 일반기업 취업준비생도 고시생의 빈자리를 메우고 있다. 1년 전 지방에서 올라와 고시촌에 자리 잡은 이주호 씨(27)는 “서울에 머물며 취업을 준비하기에는 월세가 싸고 학원이 몰려 있는 고시촌이 가장 낫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처럼 고시촌의 주인이 바뀌기 시작한 건 약 3년 전부터. 2015년 말 정부가 사법시험을 단계적으로 폐지하겠다고 밝히면서 점차 사법시험생들이 떠나기 시작했다. 녹두공인중개사무소의 조형진 대표는 “사시 폐지로 고시촌이 텅텅 빌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방을 찾는 사람은 더 늘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서울시에 따르면 고시촌으로 분류되는 서울 관악구 대학동과 서림동 인구는 올해 1분기(1∼3월) 5만158명으로 2015년(4만9887)보다 오히려 늘었다.

최근 고시촌에 터를 잡는 외국인 노동자도 늘고 있는 추세다. 14일 오후 7시경 고시촌 골목을 삼삼오오 무리지어 다니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눈길을 끌었다. 인근 편의점 주인은 “중국이나 러시아에서 온 외국인이 특히 많다”고 말했다. 올해 3월 말 대학동에 살고 있는 외국인은 2015년 같은 기간(552명)의 약 2배인 1056명으로 빠르게 증가했다.


○ 불법 리모델링도 성행

고시촌의 대표 거주민(고시생)뿐만 아니라 거주 행태도 급변하고 있다. 11일 오후 대학동의 한 골목에서는 5층짜리 고시원이었던 건물을 원룸 다세대 건물로 바꾸는 리모델링 공사가 한창이었다. 공사장 인부인 김모 씨(52)는 “최근 4, 5년 새 이 일대 고시원 건물 중 80% 이상이 원룸으로 리모델링됐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전했다.

고시촌 주인이 바뀌면서 선호하는 주거 형태도 달라진 셈이다. 고시촌에서 원룸 임대업을 하고 있는 강일봉 씨(71)는 “요즘 고시촌에 오는 젊은 사람은 대부분 화장실이나 세탁기를 같이 쓰는 고시원보다는 풀옵션 원룸을 선호하는 경향이 많다”고 말했다. 서울부동산정보광장에 따르면 지난해 고시촌 인근 단독 및 다가구 월세 거래건수는 지난해 3235건으로 2015년(936건)의 3배를 훌쩍 넘겼다.

문제는 이런 리모델링 대부분이 불법으로 이뤄진다는 점이다. 현행법상 제2종 근린생활시설인 고시원이나 독서실 등을 원룸 임대를 위한 건물로 고칠 경우 규모에 맞게 공동주택으로 용도 변경 허가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동아일보 취재팀이 이 일대 원룸 건물 54곳의 현황을 조사한 결과 5곳(9.3%)을 제외한 49곳(90.7%)이 불법으로 용도를 변경한 것으로 나타났다. 일부 건물은 과거 불법 용도 변경으로 적발된 이력이 있는데도 여전히 불법 영업을 하고 있었다.

청년주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비영리단체인 ‘민달팽이유니언’의 임경지 위원장은 “공동 주택의 경우 근린생활시설보다 건축 기준이 까다로운 데다 임대 놓을 수 있는 방이 줄어들어 불법으로 리모델링 하는 집주인이 많다”고 전했다. 이어 “이런 건물들은 소방 안전시설 등을 제대로 갖추지 않거나 시정 조치 과정에서 세입자가 강제로 방을 빼야 하는 등 피해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세입자는 계약을 하기 전 건축물 용도를 꼼꼼히 살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성휘 기자 yolo@donga.com
서민호 인턴기자 한양대 경영학부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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