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관의 오늘과 내일]제헌절 유감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7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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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관 정치부장
정용관 정치부장
어제는 고희를 딱 한 해 앞둔 제헌절이었다. 제헌절 당일인 17일 오후 청와대 여민1관 소회의실에서 수석·보좌관회의를 주재한 문재인 대통령은 비교적 여유로워 보였다. 회의 시작 전 예의 커피를 타기 위해 다른 수석비서관들과 마찬가지로 줄을 섰다가 이를 눈치챈 조현옥 인사수석비서관이 황급히 자리를 내줘 좌중에 웃음이 터지는 ‘소탈한’ 모습은 이제 뉴스거리도 안 된다. 자신의 옆자리가 비어 있는 걸 보고 “공석이 있네요”라고 했고, 임종석 비서실장이 뒤늦게 착석하자 “이 자리에 못 앉는 분들이 많아요”라며 농을 던지는 모습도 자연스러웠다.

대수보회의를 눈여겨본 건 청와대발 제헌절 메시지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꼭 개헌에 대해 문 대통령이 무슨 말을 내놓을지가 궁금해서만은 아니었다. 예순아홉 돌을 맞은 제헌절이지만 올해는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의미가 아주 특별하다. 문재인 정부는 헌법재판소의 전직 대통령 탄핵 심판 결정을 바탕으로 탄생한 권력 아닌가. 헌법적 절차에 따라 한 정권이 무너지고 새 정부가 들어선, 세계사에서 유례가 없는 일대 사건이었다. 브라질 지우마 호세프 전 대통령도 탄핵을 당했지만 의회의 결정이었고, 대통령제하에서 헌재에 의한 탄핵 결정은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다시 말해 문재인 정부의 정통성은 ‘헌법’ 그 자체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허나, 아무런 제헌절 메시지도 나오지 않았다. 모두발언 내내 최저임금 인상 결정에 따른 노사 협력을 당부하고 부정부패 척결과 방산비리 근절을 강조했을 뿐 제헌절 얘기는 일언반구 없었다. 청와대 관계자는 “문 대통령은 이미 개헌에 대한 의지를 충분히 밝혔다”며 “개헌 추진은 대통령이 아닌 국회의 몫”이라고 했다. 또 국회의장 주관하에 개헌토론회가 열리는 마당에 굳이 대통령이 개헌 메시지를 내놓을 필요가 있느냐는 설명이었다. 물론 청와대로선 개헌은 그리 마뜩지 않은 이슈일 수 있다. 자칫 임기 초 국정동력을 떨어뜨리는 블랙홀이 될 수도 있다. 과거 대통령들도 임기 초반 개헌 드라이브를 건 예는 찾아보기 힘들다.

필자가 기대했던 청와대발 제헌절 메시지는 따로 있었다. 개헌 이슈와 별개로 ‘헌법 준수 의무’에 대한 새 정부의 겸허한 태도와 의지 말이다. “새 정부는 헌법의 최고 규범성을 거듭 되새기고 늘 겸허한 자세와 두려운 마음으로 헌법을 준수해 나갈 의지를 갖고 있습니다.” 새 정부가 촛불혁명에 의해 탄생했느냐, 헌법적 질서와 절차에 의해 탄생했느냐는 동전의 앞뒷면으로 같은 얘기일 수도 있지만 나라를 어떻게 운영해갈 것이냐는 인식 면에선 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본다. 이는 국정운영의 도덕적 지향성과 절차적 정당성 간의 끊임없는 논란과도 직결되는 문제다.

권력을 만들고 쟁취하는 데는 ‘화려한 거품’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사람이 모이고 세를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뒤에는 거품을 걷어내고 ‘제도권력’을 어떻게 운영할지에 대한 방법론이 필요하다. 도덕적 권위를 앞세워 국민 다수의 지지만 바라보고 국정을 운영할 수는 없다. 때론 국민 다수의 지지에 역행해서 결단을 내리고 책임을 지는 순간도 올 것이다.

벌써 두 달이 훌쩍 지났다. 절차를 생략하더라도 빨리 성과를 내고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던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아직 4년 10개월이나 남았다. 문재인 정부의 성공은 소탈한 언행이나 제스처에만 있지 않다. 결국 국정운영 능력, 즉 콘텐츠다. 현재까지는 자꾸 부분의 문제를 전체로 치환하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 전체 구조 안에서 부분을 볼 것이냐, 부분의 문제를 전체로 볼 것이냐는 천양지차다. 제헌절에 드는 이런저런 생각이다.

정용관 정치부장 yongari@donga.com
#제헌절#문재인#수석보좌관회의#임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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