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한기흥]대북 확성기 방송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7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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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 훈련소의 아침은 활기찬 노래로 시작했다. 군가와 함께 건전가요도 제법 많이 틀었다. ‘동방의 아름다운 대한민국 나의 조국….’ 30여 년 전 훈련병 시절 들은 ‘조국 찬가’ 같은 노래는 폭염 속에 박박 기는 와중에서도 멜로디와 가사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기도 했다. ‘귓속 벌레(ear worm)’라고 하는 현상이다. 엄혹한 시대상과 딱 들어맞지 않는 노래들도 자꾸 듣다 보면 더는 의문이 들지도 않는다. 놀라운 반복의 효과다.

▷거북이 양희은 벗님들 들국화 임창정 여자친구…. 지난해 최전방 북한 사병들이 가장 자주 접한 한국 가수들이다. 아이유 소녀시대 빅뱅 등 케이팝 스타들도 빠지지 않는다. 군 심리전단이 500W급 대형 스피커 48개로 구성된 확성기들을 통해 이들의 노래와 한국의 발전상, 북한의 내부 실상 등을 전하는 방송을 군사분계선 너머로 송출했다. 인민군들은 저도 모르게 따라 흥얼거리거나 무슨 소식인지 귀담아듣기도 할 것이다. 김정은의 이복형 김정남 독살 같은 뉴스는 얼마나 솔깃했겠나.

▷지난달 13일 경기 연천 쪽으로 귀순한 북 경계병은 “대북 확성기 방송을 듣고 한국의 발전상을 동경하게 됐다”고 밝혔다. 확성기가 북을 최전방부터 흔드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는 방증이다. 2015년 8월 지뢰 도발을 응징하기 위해 우리 군이 11년 만에 대북 확성기 방송을 재개했을 때 북은 고사포를 쏴대며 격렬히 반발했다. 그러다 남북 고위급 접촉에서 중단을 애걸복걸한 것도 대북 확성기로 자유와 진실이 전파되는 것을 그만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정부가 조만간 북에 군사실무회담을 제안할 것이라고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최근 베를린에서 정전협정 64주년인 27일을 기해 남북이 군사분계선에서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는 일체의 적대행위를 중지할 것을 제안한 데 따른 조치다. 대북 확성기 방송 중단이 협상 테이블에 오를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북은 베를린 구상을 ‘잠꼬대 같은 궤변’이라고 퇴박하는데 정부가 너무 서두른다. 몰래 확성기 방송을 애청해 온 북한 군인들은 어쩌라고….
 
한기흥 논설위원 eligius@donga.com
#대북 확성기 방송#군사실무회담#귓속 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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