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R/Case Study]얇은 노트북 밀어낸 LG의 ‘초경량 g(그램) 혁신’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7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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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전자 그램 시리즈 성공 스토리

2010년 이후 LG전자 PC사업부의 시련은 계속됐다. 인텔이 제시한 울트라북(태블릿PC의 장점과 노트북의 장점을 결합해 휴대성을 강화한 노트북) 시대가 본격 도래하면서 글로벌 PC 제조사들에 점점 밀려나고 만 것이다. 성능이나 디자인에서 큰 차별점을 제시하지 못했던 터라 국내 PC시장을 가까스로 지키는 데만 그쳤다. 이에 사업 철수를 놓고 무성한 소문이 돌기도 했다.

이처럼 어려운 시기에 놓였던 LG전자는 2014년부터 내놓은 980g짜리 초경량 노트북 ‘그램 시리즈’로 비로소 환골탈태할 수 있었다. 국내 시장 ‘만년 2등’에서 벗어나 노트북 시장을 이끄는 선두주자로 나서게 된 것이다. LG 측은 2017년까지 3년 동안 매년 그램13, 14, 15를 선보이며 혁신을 거듭했다. 이러한 성공에 탄력을 받아 올해는 어댑터 없이도 24시간 사용할 수 있는 ‘그램 올데이’를 내놓으며 국내 노트북 시장을 선도했다. 그 결과는 숫자로도 증명됐다. LG전자의 노트북 부문 매출은 각각 전년 동기 대비 2014년 12%, 2015년 17%, 2016년 20% 증가했다. 그동안 LG전자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DBR(동아비즈니스리뷰) 228호(2017년 7월 1일자)에 실린 LG전자 그램 시리즈의 성공 스토리를 요약 소개한다.

○ 콘텐츠 ‘생산’ 기기의 힘

2010년 이후 노트북 시장에 대한 우울한 전망이 이어졌다. 정보기술(IT) 업계에선 노트북 사양은 더 이상 개선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정점에 달했다고 판단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미 데스크톱과 비슷한 성능과 저장장치를 갖출 정도로 발달됐기에 성능만으로 차별화하기란 쉽지 않았다. 따라서 글로벌 경쟁사들은 성능 대신 가격 경쟁에 돌입했다. 한편 국내 경쟁사는 노트북 대신 태블릿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노트북 시장이 커지기 어려운 상황에서 대형 글로벌 기업들과 ‘나눠먹기’식 경쟁을 하는 대신 신시장을 개척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LG전자는 노트북 시장에 잔류했다. 생산성 측면에서 노트북을 대체할 수 있는 디바이스가 앞으로도 나오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태블릿PC와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검색을 하고, 동영상을 찾아보고, 문서를 읽을 수는 있다. 하지만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작업을 하기엔 불편하다. 학생들은 집과 학교, 도서관을 오가며 과제를 작성해야 하고, 직장인들은 사무실뿐 아니라 어디서든 서류 작업을 해야 한다. 태블릿PC가 등장하고 대형 디스플레이가 장착된 스마트폰, 심지어 이들과 연동되는 휴대용 키보드까지 나왔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노트북으로 공부하고 일한다.

김석호 LG전자 PC개발실 수석연구원은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로는 콘텐츠를 ‘소비’할 수는 있지만 ‘생산’하기가 어렵다. 노트북은 지금까지도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디바이스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기기들이 노트북을 대체하지 못할 것으로 내다봤다”고 말했다.

판단은 적중했다. 5년 후인 2017년에도 태블릿PC는 노트북을 대체하지 못했다. 오히려 태블릿PC의 한계가 명확해졌다. 스마트폰은 노트북과 전혀 다른 용도로 쓰이며 다른 시장으로 갈라져 나갔다. 태블릿PC 위주의 전략을 폈던 삼성전자 역시 2015년 PC독립사업팀을 만들었다.

당시 대부분의 노트북 업체는 인텔이 제시한 울트라북의 조건인 ‘얇고 오래가는’ 콘셉트에 집착했다. ‘더 가벼운 노트북’을 상상하지 않은 것이다. 가격 경쟁에서 승리한 글로벌 노트북 업체들은 이미 확보한 시장을 유지하는 데 주력했다. 하지만 시장 확대가 절실했던 LG전자의 입장은 달랐다. 기존 노트북 사용자를 끌어들일 수 있는 요인을 찾아야 했다. 무게는 ‘빈곤’ 속에서 찾아낸 혁신의 단서였다. 자체 조사 결과 상당수 소비자는 울트라북이 여전히 무겁다고 답했다. 그들이 원하는 제품은 ‘얇은 노트북’이 아니라 ‘가벼운 노트북’이었다. LG전자는 현존하는 가장 가벼운 노트북으로 시장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기로 했다. 이에 맞춰 980g이란 도전 과제를 설정하고 개발에 나섰다.

980g 자체가 혁신의 상징이었다. 1kg에 조금 못 미치는 990g보다도 ‘10g’ 더 혁신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이다. 이동한 LG전자 마케팅부 차장은 “990이란 숫자는 99%를 뜻한다고 봤다”며 “완전에 가까운 99%보다 더 큰 혁신의 산물을 제시하겠다는 포부를 ‘980g’이란 숫자에 담았다”고 말했다.

○ 혁신에 혁신을 더하다

가벼운 노트북을 개발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수많은 부품의 무게를 1g이라도 줄이기 위한 PC사업부의 사투가 시작됐다. 담당자들이 흘린 땀은 그램의 내부를 보는 순간 느낄 수 있다. 특히 회로기판 부분이 인상적이다. 일반 노트북처럼 정갈한 네모 모양의 기판 위에 부품과 전선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지 않다. 전선과 부품들이 한쪽으로 모여 있고 회로기판 중간중간에는 구멍을 뚫어 무게를 줄였다. 웹캠을 모니터와 키보드를 잇는 힌지 부분 중앙으로 옮겨 베젤 넓이를 최소화하는 등 새로운 시도가 이어졌다. 이는 LG디스플레이, LG화학, 생산기술원 등 계열사 간 협업, PC사업부 내 각 개발팀에 별도로 부여된 목표 설정 등을 통해 가능했다.

보통 신제품 개발은 시장 분석, 제품 기획, 디자인, 개발 및 생산 단계를 거치게 된다.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몇 년의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그러나 그램은 달랐다. 신제품에 들어가야 할 새로운 기능이나 콘셉트를 단시간에 정하고 곧바로 개발에 들어갔다.

혁신 기간이 짧다고 해서 혁신 결과까지 ‘단명’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짧은 기간 동안 되풀이한 혁신 과정을 통해 혁신의 완성도가 올라갈 수 있다. 그램의 혁신 과정이 그랬다. 2014년 개발된 그램13의 노하우는 그램14에, 그램14의 신기술과 시행착오로 얻은 노하우는 고스란히 그램15에 적용됐다. 그러면서 소비자가 원하는 사용감을 높이고 가벼운 무게 때문에 지적받았던 내구성도 계속 높여 나갔다. 가볍지만 튼튼하고, 얇지만 성능이 떨어지지 않는 노트북을 만드는 과정이 4년간 반복된 것이다.

올해 LG전자는 배터리 없이 24시간 쓸 수 있는 ‘그램 올데이’를 선보여 소비자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무게 패러다임을 그대로 적용해 980g보다 더 가벼운 노트북을 만들게 되면 많은 돈과 시간이 들지만 그에 비해 소비자의 만족도는 크게 증가하지 않을 것으로 분석했다. 그 대신 무겁고 부피를 차지하는 어댑터를 없애고 24시간 사용할 수 있는 탄소나노튜브 배터리를 장착해 간편성과 편리성을 증가시켰다. 소비자의 한계 효용을 냉철하게 간파하고 새로운 소비자 효용을 제시한 시도였다.

권기환 상명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그램은 전형적인 성숙기 제품에 고객이 기대하는 본질적 가치를 접목해 성공한 보기 드문 사례”라며 “지금까지 알려진 제품의 성숙기 시장 대응 방식을 재구성함으로써 새로운 시장을 창출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미영 기자 mylee0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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