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여성이여, 냉혹한 세상에 펀치를 날려라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7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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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노벨문학상 수상한 저자, 아프리카·유럽 등 배경으로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에 주목
고통 앞에서 기죽지 않고 헤쳐나가는 여성의 모습 그려

◇발 이야기:그리고 또다른 상상/J.M.G. 르 클레지오·정희경 옮김/432쪽·문학동네·1만5500원

구스타프 클림트의 ‘부채를 든 여인’. 17세기 이후 유럽 여성들은 사랑을 표현하는 도구로 부채를 사용했다. 르 클레지오는 더 나은 삶과 사랑을 위해 모험을 감수하는 여성들의 의지와 내밀한 감정의 흐름을 파고들었다. 동아일보DB
구스타프 클림트의 ‘부채를 든 여인’. 17세기 이후 유럽 여성들은 사랑을 표현하는 도구로 부채를 사용했다. 르 클레지오는 더 나은 삶과 사랑을 위해 모험을 감수하는 여성들의 의지와 내밀한 감정의 흐름을 파고들었다. 동아일보DB
스페인에서 돈을 벌기 위해 밀항하다 붙잡혀 폐인이 된 연인을 데려오는 세네갈 여성 파투, 자기중심적인 남자 친구에게 얽매이길 거부하고 홀로 아이를 낳는 프랑스 여성 유진, 내전이 일어나자 의지할 곳 없는 친구를 데리고 버텨내는 라이베리아 여성 마리.

9개의 단편 소설과 1개의 에세이로 구성된 이 책에는 거친 파고에 맞서 단단하게 생의 끈을 부여잡는 여성들이 등장한다. ‘우연’ ‘타오르는 마음’ ‘아프리카인’ 등으로 유명한 저자는 200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후 3년간 집필한 작품을 모아 이 소설집을 펴냈다. 여성을 비롯해 또래보다 인지 능력이 떨어지지만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남성, 테러에 희생된 여인의 배 속 태아 등 소외된 존재들의 목소리에 주목했다. 저자는 이 책에 대해 “저항이라는 주제로 소설을 쓰고자 했다”고 말했다.

프랑스 니스와 나이지리아 등에서 자랐고, 중남미를 여행하며 다양한 문화를 접한 저자의 열린 태도는 글 속에 진하게 녹아 있다. 세네갈, 라이베리아, 가나 등 아프리카 여러 나라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져 이국적인 정취를 자아낸다. 내전과 식민 지배, 가난으로 신음하는 아프리카의 현실이 정교하게 묘사된 가운데 오래된 나무에 영혼이 깃들어 있고, 독수리, 하이에나가 사람을 지켜준다고 믿는 아프리카인의 세계관도 담겨 있다.

책장을 넘기는 속도는 중반을 향해 갈수록 가속도가 붙는다. ‘야마 나무’는 참혹한 살인과 겁탈이 난무하는 내전 속에서 펼쳐지는 여성 간의 끈끈한 연대를 밀도 있게 그렸다. ‘빛나는 작은 돌멩이’에 불과한 ‘피의 다이아몬드’로 인해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고발하고, 인명 구조를 할 때마저 피부색에 따라 차별하는 유엔군의 행태도 꼬집는다. ‘L.E.L. 마지막 날들’은 가나를 지배하는 영국인 총독과 아내 러티샤, 총독의 가나인 현지처 아두미사 간에 벌어지는 긴장이 속도감 있게 전개된다. 다만 총독에게 버림받은 아두미사의 저주가 러티샤를 향하는 대목은 유럽 남성 중심적 사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저자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 같다. 개연성이 충분히 있는 설정이지만 러티샤 역시 식민지에서 현지처를 두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 남성들의 이기적인 욕망의 희생자이기 때문이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에밀리 플뢰게’. 주체적인 삶을 산 플뢰게는 여성 편력이 화려한 클림트가 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찾았던 영원한 연인이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에밀리 플뢰게’. 주체적인 삶을 산 플뢰게는 여성 편력이 화려한 클림트가 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찾았던 영원한 연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린 듯하지만 세상을 향해 보란 듯이 우뚝 서는 여성들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에는 온기가 스며 있다. 욕망을 채우는 데 급급한 남성에게 펀치를 날리고 홀로 당당하게 걸어가는 여성에게 응원을 보낸다. 생명을 품어내고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존재에 대한 경외감도 숨기지 않는다. ‘발 이야기’에서 임신한 유진이 진통을 느끼며 하는 생각에는 여성에 대한 저자의 시선이 명료하게 투영돼 있다. ‘바로 내가 나에게로 오는 중이다. 나는 다른 누구일 수 없고, 다른 곳에 있을 수도 없다.’

원제는 ‘Histoire Du Pied Et Autres Fantaisies’.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발 이야기#j.m.g. 르 클레지오#histoire du pied et autres fantais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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